• 기자명 윤혜정 기자
  • Economy
  • 입력 2023.07.17 09:17
  • 수정 2023.11.17 14:14

[금융의神] 송인상⑪ 위대한 이코노미스트는 사라지지 않는다

동양나이론 회장, 섬유에서 첨단신소재로
전경련 부회장 활약, 능률협회컨설팅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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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민족은행은 말살됐고 해방 후 우리 금융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마저도 전쟁으로 파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77년. 대한민국 금융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연간 수조 원대 순익을 거두고, 여의도 증권가는 '아시아의 월스트리트' 반열에 올랐으며, 리딩 보험사 한 곳의 자산 규모가 대한민국 한 해 예산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뽕밭이 거저 바다가 된 건 아니다. 원조경제시대 굴욕을 감내했고 개발시대엔 "한국 은행은 정부의 현금인출기"란 조롱까지 받아야 했으며 외환위기 땐 퇴출과 구조조정으로 생존마저 위협받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대한민국 금융은 더 커지고 강해졌다.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모지를 개척하고, 혁신을 거듭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전설의 금융인들! 우리 금융은 아직 얕고 작은 바다다. '고객가치'와 '글로벌'과 '지속가능'의 더 크고 깊은 바다로 나아가려면 그들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글로벌e〉가 77년 대한민국 금융사(史)에 빛나는 77명의 금융영웅을 탐구하는 이유다.

송인상은 수은을 그만둘 무렵 사돈인 조홍제 효성 회장의 건강이 나빠지자 사위 조석래 사장을 돕기로 했다. 1980년 효성의 주력인 동양나이론(지금의 효성티앤씨) 회장이 됐다. 송인상은 섬유 중심에서 경영다각화를 통해 첨단산업, 신소재 같은 분야로 확장해 나갔다.

송인상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던 정주영 현대 회장의 요청으로 부회장직을 맡았다. 시장경제원칙을 추구하면서 한국 경제의 국제화를 이끄는 한편 국내외 경제 현안을 발굴해 정부에 정책을 건의했다.

국제기구와 외국 경제단체와의 교류 협력을 강화하고 기업의 사회공헌 사업을 촉진해 국내 산업이 선진화하도록 지원과 자문을 아끼지 않았다. 송인상은 88서울올림픽 유치와 태평양경제협의회 설립에도 기여했다. 시장경제를 다룬 <자유주의>시리즈로 국민들이 경제를 쉽게 이해하도록 노력했다.

1986년 한국능률협회 4대 회장을 맡은 송인상은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을 창립해 우리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도록 지식과 노하우를 제공했다.

 

 

에디슨은 "천재는 노력을 계속하는 재능"이라고 했고, 송인상은 "인재는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효성 고문으로 신입사원 연수 때마다 강연하는 열정을 보여준 송인상이야말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을 계속한 천재이자 주어진 임무를 끝까지 수행한 인재였다.

많은 업적과 화려한 수식어에도 송인상은 '고독한 이코노미스트'였다. 정부와 국회는 경제문제도 정치적으로 판단했다. 화폐개혁 때는 자유민주주의를, 대일무역중단 때는 민족주의를, 환율변경 때는 국수주의를 기준으로 삼았다. 경제 부흥이 당연한 목적인데도 과정은 정치적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가난한 조국의 미래를 위해 흘린 송인상의 눈물과 극복 의지는 결국 기적을 만들어냈다.

2007년 송인상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송인상은 같은 일로 감옥살이를 하기도, 훈장을 받기도 한 것이다. 송인상은 2015년 봄 한국능률협회 명예회장이 향년 101세로 별세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송인상을 "이 나라 근대사 최후의 증인"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정치의 계절이 바뀌고 역사가 흘러 그와 그가 한 일들이 잊혀진다 해도 '위대한 이코노미스트'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걸어간 길 끝에서 우리가 걸어갈 길이 시작되므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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