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윤혜정 기자
  • Economy
  • 입력 2023.06.29 13:56
  • 수정 2023.11.17 14:12

[금융의神] 송인상⑦ '한강의 기적'을 만든 '경제개발3개년계획'

디젤기관차, 수력발전소, 충주비료공장
대한민국의 산업혁명을 주도하다

관련기사

 

 

일제강점기 민족은행은 말살됐고 해방 후 우리 금융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마저도 전쟁으로 파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77년. 대한민국 금융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연간 수조 원대 순익을 거두고, 여의도 증권가는 '아시아의 월스트리트' 반열에 올랐으며, 리딩 보험사 한 곳의 자산 규모가 대한민국 한 해 예산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뽕밭이 거저 바다가 된 건 아니다. 원조경제시대 굴욕을 감내했고 개발시대엔 "한국 은행은 정부의 현금인출기"란 조롱까지 받아야 했으며 외환위기 땐 퇴출과 구조조정으로 생존마저 위협받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대한민국 금융은 더 커지고 강해졌다.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모지를 개척하고, 혁신을 거듭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전설의 금융인들! 우리 금융은 아직 얕고 작은 바다다. '고객가치'와 '글로벌'과 '지속가능'의 더 크고 깊은 바다로 나아가려면 그들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글로벌e〉가 77년 대한민국 금융사(史)에 빛나는 77명의 금융영웅을 탐구하는 이유다.

"원조자금으로 우리 경제를 부흥시킬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도출하세요. 협상할 때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원조 당국의 명분도 살려주면서 우리 주장을 관철시켜야 합니다."

경제조정관이 된 부흥부장관 송인상은 직원들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유엔이 한국의 전후 부흥을 위한 5개년계획으로 만든 <네이산리포트>는 다른 아시아 독립국처럼 농업기술을 발전시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포인트를 두었다. 송인상은 반대했다.

"자원이 없는 한국이 살 길은 공업화로 수출강국이 되는 것이다." 미국은 원조자금을 1년치씩 주어 한국 정부는 자금의 규모와 기간도 모른 채 나라살림을 꾸려야 했고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송인상은 원조 당국에 "3년이면 3년, 5년이면 5년간 얼마나 원조해줄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동시에 '외자도입법' 도입을 추진해 원조 당국에 신뢰를 주며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세워나갔다.

"원조 당국의 요구대로 비료, 원면, 잉여농산물, 공업원료 등을 다른 나라에서 구입해 국내서 팔아 국방비로 쓰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다." 송인상은 '경제개발15원칙'을 세운 경험을 살려 '산업개발위원회'를 만들고 미국 오리건대 연구팀과 함께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산업연관분석표를 만들고 투자 대비 성과를 예측해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이런 노력들로 '경제개발3개년계획'을 확정, 발표했지만 4·19가 일어나 빛을 보지는 못했다.

송인상의 구상은 박정희정부에서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구체화됐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발전은 송인상이 구상하고 발표한 '경제개발3개년계획'에서 시작됐다.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시절 송인상은 안정을 넘어 성장을 꿈꾸며 수십 년 후를 내다본 것이다.

송인상은 공업화정책을 하나씩 현실화해 나갔다. 석탄을 때 움직이던 기관차대신 디젤기관차를 들여올 땐 실직을 우려해 반대하는 철도원들을 설득해야 했다. "지금 디젤로 바꾸지 않으면 나중에 철도도 죽습니다. 철도가 쌩쌩해야 물류도 빨라지고 산업도 발전하는 겁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이 만든 기관차 27대가 부산항에 도착했고 직원을 교육할 25명의 철도기술고문단도 미국에서 왔다. 공업국으로 가는 송인상의 기차가 기적을 울렸다.

 

1957년엔 원조 당국에 충주 수력발전소 건설 자금 5,000만 달러를 신청했다. 화력발전소를 우선 건설하고 부족한 전력을 수력발전으로 보충하는 추세였는데 장기경제개발을 염두에 둔 송인상은 석탄을 계속 투입해야 하는 화력발전소는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원조 당국의 반대에도 송인상은 충주수력발전소 건설을 관철시켰고 한국은 공업화의 동력이 될 발전설비를 갖추었다.

송인상은 언제까지나 미국 잉여농산물에 의존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충주에 비료공장을 짓기로 했다. 농업국이던 한국을 공업화하는 상징적인 프로젝트였지만 경험과 기술, 원조 당국과 절차상 어려움까지 겹쳐 있었다. 비료의 종류, 입지 선정, 설계와 디자인까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건설을 맡은 미국 맥그로하이드로카본은 애초 제시한 건설비를 다 쓰고 3분의 1이 넘는 금액을 더 요구했다.

증액할 수 없다는 원조 당국과 담판을 지은 송인상의 노력으로 비료공장이 완공됐고 이때 채용한 비료 기술자들이 훗날  한국 화학비료공장 핵심 기술진을 양성하는 데 큰 몫을 했다.

"기업가가 많이 나와야 나라 경제가 발전한다. 기업이 많아지면 일자리가 늘어나고, 월급 받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수도 늘어나 재정이 탄탄해져 국민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송인상은 기업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자금이 모자라 애를 먹는 기업은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외환보유액은 1억 달러가 채 안 됐지만 시설과 원자재를 수입하려면 달러가 필요했고 송인상은 그들에게 최대한 자금을 융통해 주었다. 대한한공의 전신인 KNA(대한국민항공사)도 송인상의 도움으로 항공기를 들여올 수 있었다.

어느덧 대한민국도 농업의 시대에서 공업의 시대로 이륙하고 있었다. <계속>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