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윤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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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4.07 09:35
  • 수정 2023.11.17 14:12

[금융의神] 송인상⑤ 전쟁 중 IMF·IBRD 가입···한·미·일 외교의 교과서

'맨해튼의 기적' 만든 최빈국 영웅
42년 후 외환위기 극복의 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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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민족은행은 말살됐고 해방 후 우리 금융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마저도 전쟁으로 파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77년. 대한민국 금융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연간 수조 원대 순익을 거두고, 여의도 증권가는 '아시아의 월스트리트' 반열에 올랐으며, 리딩 보험사 한 곳의 자산 규모가 대한민국 한 해 예산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뽕밭이 거저 바다가 된 건 아니다. 원조경제시대 굴욕을 감내했고 개발시대엔 "한국 은행은 정부의 현금인출기"란 조롱까지 받아야 했으며 외환위기 땐 퇴출과 구조조정으로 생존마저 위협받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대한민국 금융은 더 커지고 강해졌다.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모지를 개척하고, 혁신을 거듭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전설의 금융인들! 우리 금융은 아직 얕고 작은 바다다. '고객가치'와 '글로벌'과 '지속가능'의 더 크고 깊은 바다로 나아가려면 그들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글로벌e〉가 77년 대한민국 금융사(史)에 빛나는 77명의 금융영웅을 탐구하는 이유다.

"인플레이션으로 악명 높은 나라가 튀르키예, 칠레, 그리고 한국이오. 여기 와서 가입시켜달라고 떼쓰기 전에 당신네 나라 인플레이션부터 잡으시오." IMF(국제통화기금)의 혼 전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1953년 5월 한국은행 부총재 송인상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연방준비은행 연수를 위한 길이었지만 백두진 재무장관의 주문은 따로 있었다. "IMF와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가입을 타진해 보시오."

한국은행 조사부는 송인상의 지휘로 '경제의 유엔'으로 불리는 두 기구를 깊이 연구해 왔고 송인상은 두 기구에 가입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한 터였다. 면박을 당했지만 송인상은 그 말이 맞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맨해튼의 기적' 만든 최빈국 영웅

아직 전쟁 중인 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 IMF 미국대표 사우자드와의 면담도 소용 없게 되자 송인상은 주미 일본대사관의 와타나베 공사와 점심을 함께했다. 그 해 일본은 두 기구에 가입했다. "무조건 국무성 문을 두드리세요. 국무성만 움직여주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서 가입했으니까요."

세계 경제와 국제 정세에 밝고 발도 넓은 와타나베의 조언은 믿을 만 했다. 와타나베는 후에 아시아개발은행 총재를 지냈다. 송인상은 케네스 영 극동아시아 국장과 노엘 헤멘딩거 한국담당과장을 만나 설득했다.

"우리가 IMF에 가입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미 정부가 1억 달러를 원조하는 것보다 도움이 될 것이오.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되는 방법을 찾아주시오."

몇 달 동안 국무성 문을 두드려도 진전이 없었지만 송인상은 국무성 문턱이 닳도록 찾아갔다. 뉴욕연방준비은행에서 연수하는 중에도 송인상의 머릿속은 IMF와 IBRD 가입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국무성 빌딩은 한여름인데도 냉방이 되지 않아 오후면 모두 퇴근해 헛걸음 하지 않으려고 오전 10시에 찾아가 기다렸다.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올 때면 푹푹 찌는 더위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서울에서는 휴전을 유도하는 월터 로버트슨 미 국무차관보와 이를 결사반대하는 이승만이 대립하고 있었다. 한국 여학생들이 철조망 앞에서 휴전반대 시위를 하는 장면이 <뉴욕타임스>에 크게 실리기도 했다. 송인상은 7월 로버트슨이 국무성에 잠시 들렀을 때를 놓치지 않았다. "한국이 두 기구에 가입하지 못하면 전쟁의 국면도 나빠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두 기구에 가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답을 듣지 못했지만 믿을 곳은 국무성뿐이었다.

송인상은 미 정계에 영향력 있는 리드 얼바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로부터 소개받은 변호사가 송인상이 접촉한 국무성 관계자들 외 다른 인사와도 선이 닿아 있었다. 9월 10일, 마침내 미 국무장관이 주한미국대사에게 훈령을 내렸다. "송인상 한국은행 부총재가 국무성에 와 한국이 IMF와 IBRD에 가입하길 희망하는데, 이 문제에 관해 한국정부와 긴밀히 상의하라."

송인상의 눈물겨운 노력에 워싱턴 하늘도 감동했던 것일까. IMF와 IBRD는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이 제안해 만든 국제재정기구로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 재정을 함께 고민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국가들이 만든 것이다. 전쟁 중인 최빈국 처지의 한국이 IMF와 IBRD에 가입한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42년 후 외환위기 극복의 단초

우리나라는 1955년 8월 26일 IMF와 IBRD에 58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6·25 때 미연방준비제도에 옮겨놓은 금괴가 가입출자금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대한민국이 두 기구의 정식회원국이 되자 한국 정부와 한국 경제에 대한 세계의 인식이 달라졌다.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차관을 도입해 주요 국책사업을 추진하며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했고 가입한 지 42년 후 대한민국은 송인상이 들어놓은 '보험' 덕에 국가부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그 여름 워싱턴에서 땀 흘린 젊은이에게 큰 빚을 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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