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민족은행은 말살됐고 해방 후 우리 금융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마저도 전쟁으로 파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77년. 대한민국 금융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연간 수조 원대 순익을 거두고, 여의도 증권가는 '아시아의 월스트리트' 반열에 올랐으며, 리딩 보험사 한 곳의 자산 규모가 대한민국 한 해 예산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뽕밭이 거저 바다가 된 건 아니다. 원조경제시대 굴욕을 감내했고 개발시대엔 "한국 은행은 정부의 현금인출기"란 조롱까지 받아야 했으며 외환위기 땐 퇴출과 구조조정으로 생존마저 위협받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대한민국 금융은 더 커지고 강해졌다.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모지를 개척하고, 혁신을 거듭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전설의 금융인들! 우리 금융은 아직 얕고 작은 바다다. '고객가치'와 '글로벌'과 '지속가능'의 더 크고 깊은 바다로 나아가려면 그들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글로벌e〉가 77년 대한민국 금융사(史)에 빛나는 77명의 금융영웅을 탐구하는 이유다.
"밥 굶는 국민은 없어야 한다." 재무부 이재국장 송인상의 간절함은 1950년 2월 '경제안정15원칙'으로 구체화됐다. 물가안정을 위해 재정적자를 줄이고 수신 내 여신(예금 범위 내 대출)으로 통화량을 조절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일본인들이 두고 간 재산(적산・敵産)을 국가로 귀속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조항들은 원조 당국의 지지를 받아 원조 규모를 늘리는 데 기여했다.
송인상의 '경제안정15원칙'은 대한민국 최초의 경제정책으로 전후 이승만정부의 '경제개발3개년계획'과 박정희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토대가 됐다. 정책은 나왔지만 국고는 바닥나 있었다. 세수를 늘려야 했다. 김도연 재무장관은 이승만에게 "주정(酒精)이라도 전매해 세입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송인상에게 하소연했다. 돈 쓸 데가 한두 곳이 아닌 데 군정의 지원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일본처럼 강력한 조세정책을 쓰거나 저축을 유도하기엔 국민이 가진 돈이 너무 없었다.

건국국채발행, 한국은행의 산파
송인상은 애국심에 호소하기로 했다. 이른바 '건국국채'를 발행했다. 반응이 괜찮았다. 나라를 세우는 데 국민이 동참해야 한다는 각성이 일면서 건국국채는 15년간 92억3,000만 원어치나 팔려 적자에 빠진 나라 살림에 긴요하게 쓰였다.
이재국장이 할 일 중 하나는 중앙은행을 만드는 것이었다. 송인상은 중앙은행의 위상만큼 금융정책에 힘이 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50년 6월 12일 대한민국 중앙은행 한국은행이 탄생했다. 화폐를 발행하던 조선은행을 모체로 했지만 일본식을 탈피하고 미연방준비제도(Fed)를 모델로 했다. 중앙은행을 산하에 두려는 재무부와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한국은행 간 마찰을 해소하는 일도 송인상의 몫이었다. 구용서 초대 한국은행 총재와 매주 만나 의견을 좁혀 나갔다.
한국은행을 중앙은행답게 만들려는 송인상의 노력은 계속됐다. 미국으로 날아가 연방준비제도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 체이스은행빌딩에 출장소도 개설했는데 그 덕에 지금 미 증권거래소 바로 옆에 한국은행 뉴욕지점이 자리하게 됐다.
6·25 雷出, 피난 안 가고 戰時금융 해결
은행 문을 열고 2주도 지나지 않아 6·25가 발발했다. 장·차관은 물론 대통령마저 피난하고 없는 서울에서 송인상은 전시 재무행정을 책임져야 했다. 서울 북쪽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은행마다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 송인상은 은행들에 "1인당 10만 원까지만 주라"고 지시했다. '번개인출(뇌출・雷出)'로 딱 한 번 지급하고 다시 줄을 서도 더 주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은행에는 현금을 제한 없이 공급하라고 지시했다.
서울 함락이 임박해지자 정부는 공무원과 그 가족을 우선 피난시키기로 했지만 송인상은 이튿날도 이재국으로 출근했다. 송인상은 공무원과 은행원들에게 두 달치 봉급을 선불해 주었다. 전쟁통이라 제대로 받은 공무원은 15%도 안 됐지만 부산 피난정부에 복귀하는 동기가 됐다.
그 여름, 송인상은 끝내 서울을 떠나지 못했다. 아이는 아팠고 노모는 차 없이 거동이 불가했다. 한강철교는 폭파됐고 인민군은 서울을 함락했다. 전시금융을 책임지던 고위공무원이 잡히면 끝장이었다. 송인상은 동생 집 지하에 굴을 파고 90일 가까이 숨어 지냈다. 송인상 인생에서 가장 지루하고 무더운 여름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