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윤혜정 기자
  • Economy
  • 입력 2023.07.26 09:43
  • 수정 2023.11.17 14:09

[금융의神] KB 김정태④ 뱅커의 품위는 실적에 있다

'자전거경제'는 결국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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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민족은행은 말살됐고 해방 후 우리 금융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마저도 전쟁으로 파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77년. 대한민국 금융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연간 수조 원대 순익을 거두고, 여의도 증권가는 '아시아의 월스트리트' 반열에 올랐으며, 리딩 보험사 한 곳의 자산 규모가 대한민국 한 해 예산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뽕밭이 거저 바다가 된 건 아니다. 원조경제시대 굴욕을 감내했고 개발시대엔 "한국 은행은 정부의 현금인출기"란 조롱까지 받아야 했으며 외환위기 땐 퇴출과 구조조정으로 생존마저 위협받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대한민국 금융은 더 커지고 강해졌다.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모지를 개척하고, 혁신을 거듭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전설의 금융인들! 우리 금융은 아직 얕고 작은 바다다. '고객가치'와 '글로벌'과 '지속가능'의 더 크고 깊은 바다로 나아가려면 그들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글로벌e〉가 77년 대한민국 금융사(史)에 빛나는 77명의 금융영웅을 탐구하는 이유다.

1998년 김정태는 1,500명 동원증권 수장에서 1만2,000명 주택은행 수장으로 영전됐다. IMF사태 이후 은행들의 합종연횡으로 부도와 정리해고가 일상이던 때 민영화의 길로 들어선 주택은행은 24년 증권맨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김정태는 급여 대신 스톡옵션 40만 주를 받았다. 월급은 1원만 받기로 했다. 최고경영자부터 쇄신해야 한다는 각오였다.

"피는 한 번만 흘린다." 취임 한 달 만에 대량 감원을 예고한 김정태는 비장했다. '임원 전원, 1급 절반, 2급 40%, 3급 30%, 노조원 10~20% 감원'. 공적자금을 받은 부실은행 못지않은 조치였다. 김정태는 수익 위주의 경영방침을 강조했다.

"외형보다 내실이 중요하다. 필요하면 합작이든 인수든 제휴해야 한다." 김정태는 취임 첫 해 창립 이래 최대인 4,500억 원의 당기순익을 냈다. 은행권 최고였다. 추가 감원은 없었다. '단 한 번'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뱅커의 품위는 정장과 넥타이가 아니라 실적에 있다. 나는 장사꾼이다. 우리 모두 장사꾼이 돼야 한다. 훌륭한 장사꾼이 존경받는 조직을 만들자"는 일성을 증명한 것이다.

1997년 정부가 한국주택은행특별법을 폐지하고 민영화를 선언했지만 주택은행은 공기업 태를 벗지 못했다. 김정태는 형식 파괴에 나섰다. 보고체계를 간소화하고 회의자료도 디지털화했다. 임직원 엘리베이터와 전용식당을 없애고 복장도 자율화했다. "제대로 경영하려면 '황제의식'을 포기하는 게 중요하다"며 백의종군했다.

 

 

"정형화된 의례나 불필요한 절차, 관행 따위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라며 불필요한 조직을 통폐합하고 영업력을 강화해 나갔다. '능력인사'를 단행하고 규모보다 수익을 우선하며 실정에 맞는 경영전략을 세웠다. 시장 중시라도 미국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었다. 연봉제를 도입하더라도 은행원 신분을 보장해야 했다. "성과급을 줄 땐 못하는 직원들의 몫을 깎기보다 잘한 이들에게 얹어주는 것이 낫다."

김정태가 행장이 되고 주택은행엔 '알면 행동하라'는 말이 생겼다. 컨설팅사가 프리젠테이션할 때 한 임원이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라며 중지시키자 김정태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왜 실천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한 후 임원을 해고했다. 김정태는 은행을 경영하며 '결정의 속도'를 강조했다. "신문, 특히 칼럼은 읽어두면 큰 도움이 된다. 주말마다 짓는 농사에서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중요함을 배웠다. 무, 배추 같은 김장거리는 일주일만 늦어도 차이가 크다. 순간순간의 결정이 중요한데 은행원들은 증권맨보다 이런 훈련이 덜 돼 있는 것 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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