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민족은행은 말살됐고 해방 후 우리 금융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마저도 전쟁으로 파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77년. 대한민국 금융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연간 수조 원대 순익을 거두고, 여의도 증권가는 '아시아의 월스트리트' 반열에 올랐으며, 리딩 보험사 한 곳의 자산 규모가 대한민국 한 해 예산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뽕밭이 거저 바다가 된 건 아니다. 원조경제시대 굴욕을 감내했고 개발시대엔 "한국 은행은 정부의 현금인출기"란 조롱까지 받아야 했으며 외환위기 땐 퇴출과 구조조정으로 생존마저 위협받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대한민국 금융은 더 커지고 강해졌다.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모지를 개척하고, 혁신을 거듭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전설의 금융인들! 우리 금융은 아직 얕고 작은 바다다. '고객가치'와 '글로벌'과 '지속가능'의 더 크고 깊은 바다로 나아가려면 그들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글로벌e〉가 77년 대한민국 금융사(史)에 빛나는 77명의 금융영웅을 탐구하는 이유다.

당시 창구직원들은 손님들이 장사진을 쳐도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김정태는 지점에서 고객들의 전화상담 업무를 떼어냈다. 1999년 은행 최초로 전문 상담원만 550명이 넘는 대형 콜센터를 만들어 모든 지점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처리했다.

'후선업무 지원센터'도 전국에 41개나 설치했다. 연체관리팀이 개인대출, 신용카드, 신탁대출, 기금대출 등 단기연체 관리를 책임지고 보증사고통지와 이행청구업무도 맡았다. 대출실행팀은 개인대출 신용평가, 담보평가 적정성 확인과 주택금융신용보증서 발급 같은 업무를 담당했고, 무수익여신관리팀에서는 무수익여신과 부실채권을 관리하며 경매 소송 업무를 맡았다. 업무지원팀에서는 점포임대차계약이나 복권, 어음교환 업무를 맡았다. 지점의 잡무가 획기적으로 줄었고 고객 대기시간도 크게 줄었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은 '개인신용평가시스템(CSS)'과 '기업신용평가시스템(CRS)' 도입이다. 대출심사를 사람이 하기 때문에 비리가 반복된다고 생각한 김정태는 "변화는 구호가 아니라 시스템으로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스템은 대출비리를 원천봉쇄할 자물쇠였다. CSS와 CRS를 만드는 작업은 맥킨지에 맡겼다. 1999년 11월이 되자 누구든 창구에 가서 인적사항을 입력하면 대출한도와 금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CRS 구축으로 대출을 신청하러 온 중소기업은 신용대출한도가 얼마고 담보를 추가로 제공하면 얼마를 더 대출받을 수 있는지 바로 알게 됐다.

기업여신업무를 일반 지점에서 분리해 전담팀이 최종 대출을 해줬다. 대출 승인 때는 반드시 심사역과 결재권자의 의견을 기재하도록 해 투명한 대출 시스템을 완성해 갔다. 김정태는 "시스템이 도입되면 지점장과 대출담당자가 부실대출 변상 책임에서 해방될 수 있다"며 시스템에 권한을 뺏겼다는 불만을 잠재웠다.

김정태 이전에는 부실대출이 발생하면 책임자의 퇴직금에서 손실분만큼 삭감하는 관행이 있었다. IMF사태 발발 후 은행을 떠난 직원들 가운데 퇴직금을 압류당한 채 빈손으로 떠난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지점장과 직원들이 일한 만큼 충분히 보상받는 시스템도 갖췄다. 인맥 있는 지점장은 지방에서 6개월 정도면 서울로 올라가고 인맥 없는 지점장은 2~3년 뒤에 올라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김정태는 지점장은 5년 이상 한 지점에 근무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지점장이 서울 갈 생각이나 하고 있어서야 어떻게 지역 고객들과 가까워질 수 있겠나. 서울로 올라오고 싶으면 한 직급 내려 차장으로 와라."

 

 

1999년 초 HSBC가 서울은행을 인수합병 하자 은행들은 일제히 긴장했다. 소비자금융 강자인 HSBC와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외국자본과 제휴해야 했다. 김정태도 마음이 급해졌다.

외자유치만으로는 부족했다. 파트너 확보가 절실했다. 김정태는 빠르게 움직였다. 1999년 주택은행 주가가 세 배나 뛰자 ING와 합작투자를 이끌어냈다. IMF사태 이후 은행이 해외 금융기관과 전략적 업무제휴를 체결하고 대규모 외자를 도입한 것은 독일 코메르츠방크를 끌어들인 외환은행, 미국 골드만삭스를 끌어들인 국민은행에 이어 세 번째였다.

ING는 계약 체결 후 직원을 파견해 주택은행 경영에 참여했다. 생명보험과 자산운용에 자신 있던 ING의 투자 선행 요구조건인 동시에 김정태가 바란 것이기도 했다. ING로부터 선진금융기관의 핵심역량과 금융 노하우를 흡수하려면 자본 유치 이상의 강력한 업무제휴와 사업다각화가 필요했다.

1845년 네덜란드에서 보험사로 시작한 ING그룹은 1990년대 들어 인수합병을 거듭해 덩치를 키우며 방카슈랑스의 선두주자가 됐다. ING가 주택은행을 파트너로 택한 것도 한국에서 금지됐던 방카슈랑스 시장을 겨냥해서다.

한국 정부가 2003년 8월 은행업과 보험업 겸업 금지를 풀기로 확정하면서 ING를 선택한 주택은행은 국내 방카슈랑스시장의 선두주자가 됐다. "내가 가보니 우체국에서 금융업무를 떼내 ING가 대신하고 있었다. ING를 벤치마킹하면 거미줄 같은 판매망을 구축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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