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민족은행은 말살됐고 해방 후 우리 금융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마저도 전쟁으로 파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77년. 대한민국 금융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연간 수조 원대 순익을 거두고, 여의도 증권가는 '아시아의 월스트리트' 반열에 올랐으며, 리딩 보험사 한 곳의 자산 규모가 대한민국 한 해 예산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뽕밭이 거저 바다가 된 건 아니다. 원조경제시대 굴욕을 감내했고 개발시대엔 "한국 은행은 정부의 현금인출기"란 조롱까지 받아야 했으며 외환위기 땐 퇴출과 구조조정으로 생존마저 위협받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대한민국 금융은 더 커지고 강해졌다.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모지를 개척하고, 혁신을 거듭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전설의 금융인들! 우리 금융은 아직 얕고 작은 바다다. '고객가치'와 '글로벌'과 '지속가능'의 더 크고 깊은 바다로 나아가려면 그들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글로벌e〉가 77년 대한민국 금융사(史)에 빛나는 77명의 금융영웅을 탐구하는 이유다.
김정태가 수장이 된 주택은행은 기업과 국제금융을 줄이고 주택과 개인 대출에 집중해 세계적인 소매금융사로 거듭났다. 1조5,600억 원의 대우그룹 대출금부터 회수했다. 주택은행에는 대기업 여신이 많았다. 대우 말고도 현대 1조3,000억 원, 삼성도 1조2,000억 원이 넘었다. 껍데기만 소매금융사였지 내용은 기업금융사였는데 주택은행의 자본금은 4,400억 원에 불과해 대출해 간 기업 하나만 휘청해도 살아남기 힘들었다. 보기에만 그럴싸한 '시한부 우량은행'이었다.
대우는 동원증권 사장 시절 한 푼도 거래하지 말도록 지시했던 기업이었다. 김정태는 담당자를 불러 기업 여신을 대폭 줄이라고 지시했다. 한 달 후 대우 여신 1조8,600억 원 중 고작 800억 원이 줄어 있었다. "오랜 기간 거래해 온 업체라 하루아침에 줄이기가 어렵다"는 변명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대우그룹은 발칵 뒤집혔다. 여러 경로로 압력이 들어왔다. 대우그룹 사장단에 있던 동기 셋이 번갈아 찾아와 "갑자기 자금을 회수하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 "내 체면을 봐서라도 한 번만 봐달라"고 통사정했다. 김정태는 꿈쩍도 하지 않고 여신 회수에 박차를 가했다. 만기 된 여신을 전량 회수하고 만기가 남은 여신까지 독촉했다. 신규대출은 당연히 중단했다. 가혹하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다른 선택은 없다. 멈추면 쓰러진다. 확장으로 위기를 극복할 것이다." IMF사태 직후인 1998년 1월 김우중의 의지는 결연했지만 김정태는 "멈추면 쓰러진다"는 '자전거경제론'을 "쓰러져야 멈춘다"는 역설로 받아들였다. 여신 회수가 마무리되고 1999년 7월 대우사태가 터졌다.
김정태의 선경지명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김정태는 해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맥킨지 등에 자문을 구하고 별도 네트워크를 동원해 대우의 해외사업 동향과 현금흐름을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대우의 확장 경영을 바라보는 외국의 시선은 싸늘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여신 회수 과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과 한판 싸움이 불가피했다. 주택은행은 민영화한 지 얼마 안 돼 자본을 확충할 기회가 없었다. 대우 여신을 빨리 회수하지 않으면 주택은행도 부실은행으로 전락할 게 뻔했다. 김정태는 결단을 내렸다. 행장 자리를 걸고 여신 회수를 강행했다. 그 덕에 주택은행은 가라앉는 '대우호(號)'에서 아슬아슬하게 탈출했다.
은행권의 인사청탁은 악명 높았다. 인사가 끝나면 잡음이 뒤따랐고 청탁 외압에 맞서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행장도 종종 있었다. 김정태에게도 임원은 말할 것도 없고 지점 대리 자리까지 인사청탁이 들어왔다.
1999년 2월 1일 김정태는 전 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정관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연줄을 동원해 인사와 대출 청탁을 해온다. 아직도 이것이 통할 거라고 믿는 사원에게 딱한 마음이 들 지경이다. 주택은행은 일체의 권력과 연줄이 통하지 않는 곳임을 거듭 밝힌다. 청탁에 연루된 직원은 공개할 것이다. 권력, 지연, 학연을 모두 등에서 내려놓아라. 이제부터 우리가 초지일관해 나갈 신념은 능력주의뿐이다. 청탁이 사라지는 날까지 싸우겠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