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민족은행은 말살됐고 해방 후 우리 금융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마저도 전쟁으로 파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77년. 대한민국 금융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연간 수조 원대 순익을 거두고, 여의도 증권가는 '아시아의 월스트리트' 반열에 올랐으며, 리딩 보험사 한 곳의 자산 규모가 대한민국 한 해 예산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뽕밭이 거저 바다가 된 건 아니다. 원조경제시대 굴욕을 감내했고 개발시대엔 "한국 은행은 정부의 현금인출기"란 조롱까지 받아야 했으며 외환위기 땐 퇴출과 구조조정으로 생존마저 위협받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대한민국 금융은 더 커지고 강해졌다.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모지를 개척하고, 혁신을 거듭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전설의 금융인들! 우리 금융은 아직 얕고 작은 바다다. '고객가치'와 '글로벌'과 '지속가능'의 더 크고 깊은 바다로 나아가려면 그들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글로벌e〉가 77년 대한민국 금융사(史)에 빛나는 77명의 금융영웅을 탐구하는 이유다.
김정태는 국민은행과 합병을 완료한 2002년부터 한국형 '초미니뱅크' 설립을 밀어붙였다. 3~4명의 점포를 곳곳에 진입시켜 시장을 장악해 갔다. 증권사, 새마을금고는 물론 주유소와도 손을 잡았다.
1999년 교보, 대신, 동부, 동원 4개 증권사의 계좌 개설을 대행하는 계약도 맺었다. 고객들은 증권사 지점에 가지 않고 주택은행 창구에서 계좌를 개설하고 주식거래대금을 입출금할 수 있게 됐다. 주택은행은 매매 수수료의 10%만 받기로 했다. 증권사들은 경쟁적으로 주택은행과 손을 잡았다.
계좌 개설 대행은 증권사에서 잔뼈가 굵은 김정태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였다. 수수료 수입뿐 아니라 공짜 광고효과도 컸다. 증권사들은 신문, TV, 라디오에 "주택은행에 가면 쉽게 입출금할 수 있다"고 광고했다. 주식투자자들은 자연스레 주택은행의 고객이 됐다.
2000년에는 주유소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핸디서비스(handy-service)'를 시작했다. 오일뱅크 주유소에 단말기를 설치하고 은행 전산망과 연결했다. '기름은행'에서 돈도 찾을 수 있어 주유소는 거래수수료 수익을 올리고 은행은 현금을 인출하러 지점을 찾는 고객 수를 줄일 수 있었다.

2000년 1월 김정태는 "연내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을 선언했다. 국내 은행 최초의 도전이었다. 10월 3일 뉴욕증권거래소에 걸린 태극기와 주택은행기를 바라보는 김정태의 눈이 흐릿해졌다. 아시아 은행 중 일본 도쿄미츠비시은행, 인도 ICICI에 이어 세 번째였다. 김정태는 이날을 위해 2년간 앞만 보고 달려왔다.
"한국 은행을 무시하지 마라. 2년 전 누구도 뉴욕증권거래소에 성조기와 태극기가 주택은행기와 나란히 펄럭일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가 얻은 것은 뉴욕증시 상장이라는 결과뿐 아니라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한 과정이다. 국가보다 신용등급이 높은 은행을 만들어야 한다. IMF사태 때처럼 모든 은행의 신용등급이 '투자부적격'이 돼선 안 된다. 한두 개라도 '투자적격'을 유지해야 한다. 주택은행의 시대적 소명이다. 자만은 금물이다.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