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민족은행은 말살됐고 해방 후 우리 금융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마저도 전쟁으로 파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77년. 대한민국 금융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연간 수조 원대 순익을 거두고, 여의도 증권가는 '아시아의 월스트리트' 반열에 올랐으며, 리딩 보험사 한 곳의 자산 규모가 대한민국 한 해 예산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뽕밭이 거저 바다가 된 건 아니다. 원조경제시대 굴욕을 감내했고 개발시대엔 "한국 은행은 정부의 현금인출기"란 조롱까지 받아야 했으며 외환위기 땐 퇴출과 구조조정으로 생존마저 위협받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대한민국 금융은 더 커지고 강해졌다.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모지를 개척하고, 혁신을 거듭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전설의 금융인들! 우리 금융은 아직 얕고 작은 바다다. '고객가치'와 '글로벌'과 '지속가능'의 더 크고 깊은 바다로 나아가려면 그들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글로벌e〉가 77년 대한민국 금융사(史)에 빛나는 77명의 금융영웅을 탐구하는 이유다.
2018년 조현상 효성그룹 부회장(당시 총괄사장)이 방한 중인 자비에르 베텔(Xavier Bettel) 룩셈부르크 총리의 요청에 따라 면담했다. 베텔 총리는 효성이 룩셈부르크 타이어 공장을 잘 운영해 준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한국과의 협력을 위한 조언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효성은 2006년과 2010년에 룩셈부르크 타이어코드 공장을 인수해 섬유코드와 스틸코드를 생산하고 있으며 전량을 유럽에 수출하고 있다. 룩셈부르크 총리와 조 부회장의 단독 면담은 룩셈부르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과의 오찬에 앞서 진행됐다.
조 사장은 2011년과 2014년에 기욤 장 조세프 마리(Guillaume Jean Joseph Marie) 룩셈부르크 왕세자가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효성 본사와 사업장을 방문했을 때도 이들과 만찬을 가졌다. 룩셈부르크 정상이 효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비즈니스 때문이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특별한 인연이 있기도 하다.
조 부회장은 물론 조현준 회장의 외할아버지인 송인상이 1974년 유럽공동체(EC)대사 겸 벨기에·룩셈부르크대사를 지내는 등 유럽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수출만이 살길이던 시대, 1976년 수출입은행의 본격적인 금융 지원으로 한국 경제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고도화, 현대화하기 시작했다.
2000년엔 조선산업이 세계 1위에 올랐고 2015년엔 플랜트, 건설 산업이 해외건설 진출 50년 만에 누적 수주 7,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모든 과정에 수출입은행이 있었고 그 시작에 송인상이 있었다.

송인상은 1974년 박정희의 요청을 받아 2년간 EC대사와 벨기에·룩셈부르크대사를 겸직했다. 회갑을 맞은 해였다. 한국의 경제외교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EC에 수출하던 금액이 3억4,5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한국 경제는 구조적으로 미국과 일본에 의존하고 있어 경제자립을 위해 EC와 경제협력을 확대해야 했다. 낯선 나라에서 시작한 외교관생활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공관은 협소했고 관저는 난방이 안 됐다. 그럴수록 송인상은 '국력을 길러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곳에 있으면서 단자회사와 종합금융회사 관련법을 제정할 것을 정부에 요청해 해외 금융사를 유치하고 국제종합금융사를 설립하게 됐다. "대유럽수출을 10억 달러로 끌어올리고 돌아오겠다"는 박정희와의 약속을 지키고 2년 만에 귀국한 송인상은 새로운 도전을 한다. 중화학공업 제품 수출에 장기융자를 해줄 기관이 절실했다.
송인상에게 정부는 수출입은행 설립을 부탁했고 송인상은 임원 셋과 외환은행(30명), 한국신탁은행(11명), 서울은행(6명), 감사원(2명) 출신을 끌어모았다. 수은을 설립했지만 중화학공업제품 수출을 지원하고 고가의 원자재나 항공기, 선박을 수입할 때도 융자해 주어야 했는데 자금이 충분하지 않아 정부엔 예산이 없어 한국은행과 외환은행에서 불입받아야 했다.
자금만 문제가 아니었다. 국제상거래에 융자해주는 만큼 국제법과 국제금융거래에 대한 전문지식도 필요했다. 고문변호사를 초빙해 매일 아침 은행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연수를 받았다. 송인상이 떠날 무렵 수은은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됐다. 정부의 산업정책과 연계해 각국과 외교를 돈독히 하고 미국과의 친선관계가 공고한 기관으로 우뚝 서 있었다.
송인상은 30대에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을 만들고 60이 넘어서는 수출경제의 기반이 된 수출입은행을 설립했다. 송인상의 역사는 한국 금융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선진국의 원조에 기대야 했던 한국은 2010년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이 되며 세계 최초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됐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