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민족은행은 말살됐고 해방 후 우리 금융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마저도 전쟁으로 파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77년. 대한민국 금융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연간 수조 원대 순익을 거두고, 여의도 증권가는 '아시아의 월스트리트' 반열에 올랐으며, 리딩 보험사 한 곳의 자산 규모가 대한민국 한 해 예산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뽕밭이 거저 바다가 된 건 아니다. 원조경제시대 굴욕을 감내했고 개발시대엔 "한국 은행은 정부의 현금인출기"란 조롱까지 받아야 했으며 외환위기 땐 퇴출과 구조조정으로 생존마저 위협받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대한민국 금융은 더 커지고 강해졌다.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모지를 개척하고, 혁신을 거듭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전설의 금융인들! 우리 금융은 아직 얕고 작은 바다다. '고객가치'와 '글로벌'과 '지속가능'의 더 크고 깊은 바다로 나아가려면 그들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글로벌e〉가 77년 대한민국 금융사(史)에 빛나는 77명의 금융영웅을 탐구하는 이유다.

 "원조 받은 돈으로 뭘 하든 우리 자유야. 한국 사람들 피땀으로 얻어낸 원조자금을 시멘트공장, 비료공장 같은 시설재에 써야지, 비료다 고무다 설탕이다 그런 거 사는 데 다 써버리면 뭐가 남느냐 말이야 !"

이승만은 부흥부장관이자 경제조정관인 송인상에게 원조자금을 완제품 수입하는 데 말고 공장 건설에 써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전후 대한민국 경제는 미국 원조에 기대고 있었고 그 돈은 주한유엔군 지원에도 써야 했다.

기간산업을 재건하려는 이승만과 대충자금(미국 원조물자를 팔아 적립한 돈)을 만들려는 원조 당국은 늘 부닥쳤다. 원조자금을 사용할 때 국제공개입찰에서 최저가를 쓴 일본이 낙찰되기라도 하면 이승만은 진노하며 송인상에게 책임을 물었다. 원조자금은 상호안전보장법에 따라 사용처가 적합하지 않으면 미국에 돌려줘야 했는데 그때마다 송인상은 이승만에게 결재를 받고 언론의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송인상은 원조자금을 정치자금으로 쓰던 나라들과 달리 투명하게 관리했다. 매주 한·미 양국 대표들이 합동경제위원회를 열어 사용법을 논의하고 외자관리법에 따라 사용했다.

원조금융시대, 장관의 설움

협상테이블에는 한국 측 장관 다섯과 미국 측 위원장 다섯에 양쪽 직원 20-30이 참여하고 통역 없이 영어로 진행됐다. 협상 때 부흥부 직원들은 일당백이었다. 원조 당국과 대립할 때도 끝까지 버텼다. 송인상이 협상 도중 즉답이 곤란할 땐 평소 피우지 않던 담배를 입에 물고 말을 아끼고 있으면 실무담당자가 "예스"나 "노"라는 메모를 주곤 했다.

송인상은 원조 당국과 살벌하게 대립하며 어떻게든 실익을 내려고 애를 썼다. 미국에 한 푼이라도 더 달라고 해야 하는 협상테이블에서 체면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협상이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송인상은 물러서지 않고 탁자 위 태극기에 시선을 집중하며 힘을 냈다.

미국은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월등했지만 태극기는 성조기와 조금도 다를 것 없이 대등하고 눈물이 나도록 당당했다. 

 

 

한미협상장은 공무원들의 외교 교실

송인상은 원조당국에 한국이 처한 문제점을 이해시켜 우리 경제를 살릴 방향으로 원조자금을 사용했다. 송인상은 협상장을 교실로도 활용했다. 협상 때 가급적 많은 젊은 공무원을 참석시켜 대외교섭을 배우도록 했다. 협상이 난항에 빠진 채 끝나는 날엔 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숙제를 잔뜩 안고 돌아가야 했다.

송인상이 주도한 한미합동경제위원회는 시간이 지나며 성과가 나타났다. 공장이 생기고 물가가 잡혀갔다. 수출도 늘어나 9.2%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미국 측 조정관이 본국에 돌아가 "다른 나라에 원조할 때도 한국에서처럼 합동경제위원회를 만들자"고 건의했을 정도다. 1958년 송인상은 4,200쪽이 넘는 《부흥백서》를 만들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원조자금이 정치에 쓰이지 않았음을 입증한 것이다.

미군 전투복을 한국군 체격에 맞게 고치는 것까지 세세하게 기록한 백서는 해마다 승인을 받아 쓰던 1년짜리 원조계획을 장기계획으로 바꾸는 근거가 됐고 정부도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원조금은 연간 2억5,000만 달러에 달했는데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를 "성공적"으로 평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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