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팔은 자원도 부족하고 바다도 없다. 공산품은 거의 없어 수입해 써야 하고 농산물은 수출할 만큼 풍족하지 못하다. 셰르파나 포터 등으로 일하거나 옛 스위스처럼 다른 나라의 용병으로 나가는 사람도 많다.
배우지 못한 여성이 돈을 벌 방법은 거의 없다. 간호사나 교사 같은 전문직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사무직이나 가사도우미도 되기 힘들다. 가사도우미도 해본 사람이 계속하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다. 현지인 가사도우미 중엔 "한국인 집에서만 10년 일했다"는 경우가 많다.
네팔통신원의 아버지는 경험이 없는 가사도우미를 들였는데 전기밥솥을 통째 설거지하다 망가뜨렸다. 전기밥솥이 월급보다 비쌌다. 도우미는 시골에서 열여덟 살에 결혼도 안 하고 애를 낳았는데 애기아빠가 놀고 먹으니 두 달 만에 포카라에 왔다고 한다.
의대나 공대를 졸업하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학비가 들어가는데 그 정도 스펙이 아니면 네팔에서도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다. 전문직은 공무원, 은행원, 스튜어디스, 간호사 정도다.
은행원은 돈을 만지는 직업이라 보증인이 있어야 될 수 있다. 간호사는 월급이 적고 일이 힘들다. 여자는 타국으로 일하러 가는 것도 쉽지 않다. 해외 농장이나 공장에선 여성이 끼어 있으면 숙소를 더 제공해야 하고 아무래도 남자가 야근 시키기도 편해 여자를 꺼린다.

네팔사람들에겐 '코리안드림'이 있다. 공장일이나 농사일을 해본 적 없는 이들도 기를 쓰고 한국에 가려 한다. 한국 월급이 네팔 연봉보다 많아서다. 네팔에서는 사돈의 팔촌도 가족인데 그중 한둘은 한국에 가서 돈을 벌고 있거나 돈을 벌어와 풍족하게 산다.
한국에 오는 노동자는 매년 1만 명으로 추산된다. 한국에 일하러 가려면 합격률이 10%밖에 안 되는 한국어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도시에서 공부한 은행원이나 전문대 강사도 6개월은 학원을 다녀야 한다. 먹고 자는 비용까지 8만 루피(약 80만 원)가 필요한데 시골에선 한 달에 1만 루피도 벌기 힘들다.
협동조합에서 학자금대출을 받을 수 있으면 운이 좋은 편이다. 대출을 받지 못하면 사채를 써야 하는데 연이자가 30%가 넘는다. 한국 가는 문도 좁아지고 있다. 농번기 때 3~5개월짜리 계절노동자로 들어온 70%가 도망가 한국 정부로부터 패널티를 받아 입국비자 수가 줄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아이를 예닐곱 낳는 집이 많았다. 원조가 들어오며 유아사망률이 낮아져 요즘은 많이 낳지 않는다. 네팔의 수출품목 1위가 사람이다 보니 없는 형편에도 남자아이 특히, 장남에게 투자를 집중한다. 도시에선 학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둘 이상은 낳지 않는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