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출 목표가 1,500억 원인 야구단이 등장했다. 지난해 매출 1,300억 원을 돌파한 컴투스 야구게임단의 총사령관 홍지웅은 해외시장을 겨냥한 신무기 <MLB 9이닝스: 라이벌>도 실전 투입했다. 홍지웅은 수백만 구단주를 이끌고 있다. 꽃길만 걸었던 건 아니다. 처녀작 <컴프야2008>이 적자를 냈고 <컴프야2009>도 생각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세계 여성경영인 50'에 이름을 올린 박지영 당시 컴투스 대표는 "야구는 게임빌이 잘하는 것 같다"며 "다른 장르를 뚫는 게 낫겠다" 했다. 홍지웅은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야구밖에 없다" 배수진을 쳤다. '구원투수'만 올리면 이길 수 있었다. 경영진을 설득하고 설득했다. "마지막이다." 홍지웅은 연봉을 내주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9회말투아웃에서 끝내기홈런을 쳤다. <컴프야2010>과 존재감을 각인한 한방이었다. 홈런포는 계속됐다. 국내시장 평정 후 <MLB 9이닝스>를 들고 해외시장에 출사표도 던졌다. 명장이 가는 길에 수백만 구단주도 뒤를 따랐다.
대구시민야구장은 놀이터였다. 주말엔 아버지와 표를 구입했고, 평일엔 친구들과 7회에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야구를 좋아했지만 야구로 밥먹을 생각은 없었다. 하는 게 좋았고 보는 게 즐거웠다.
5년간 투수로 뛰기도 했다. 야구선수의 꿈도 눈에 밟혔는데 어쩌다 야구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돼 있었다.

세 명이 만들어낸 <컴프야2008>을 처녀작으로 20년 넘게 한 우물을 판 홍지웅. 2002년 벤처 사번 50번을 받은 꼬꼬마가 지금은 170여 명을 이끄는 야구사령관이 됐지만 '인생야구'에선 이제 4회를 지났을 뿐이다.
"5회에 승리투수 요건을 만들고 6회 퀄리티스타트로 마운드를 내려올 테다."
선수보다 야구와 함께한 시간이 많았던, 야구가 인생이고 인생이 야구였던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구 태생이라 대구시민야구장에서 삼성을 응원했다. 게임을 만들다 보면 어느 팀을 응원하기보단 전체 구단을 보게 된다. 야구중계도 선호팀만 보는 게 아니라 하이라이트로 다 본다. 그러다 보니 삼성에 대한 애정이 좀 식었다. 어릴 땐 옷도 주고 기념품도 주고 하니까 라이언스클럽에 들어갔다."
삼성 레전드 스타들이 다 나가니 뭔가 색깔이 없어진 것도 같다.
"롯데자이언츠나 특정 구단처럼 태어날 때부터 선호팀이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삼성도 그랬다. 지금은 딱히 응원하는 팀을 정해놓기보단 많은 경기를 본다. MLB게임도 같이 만들다 보니 메이저리그도 빠짐없이 봐야 한다."
그에게 야구는 인생이다. "20년을 야구에 다 태웠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좋아하는 걸 업으로 이어간 것이.
"시민야구장을 지나다 7회말에 문을 열어주면 공짜구경을 많이 했다. 그땐 야구장이 야생이었다. 너무 더워 종이모자를 쓰기도 했고 어른들이 소주병을 왜 그렇게 경기장에 던졌는지 몰랐다."

34년 허름한 화장실의 추억
아버지가 야구를 좋아했는데 주말마다 야구장에 데리고 갔다.
"남동생도 있는데 꼭 나만 데리고 갔다. 어머니와 동생은 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경기시간이 좀 줄었는데 그땐 워낙 경기가 길어 애들이 다 보기는 힘들었다. 요즘처럼 편의시설이 있던 것도 아니고."
대구시민야구장은 1948년 개장했다. 삼성라이온즈 1군 홈구장으로 사용되다 2015년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3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민야구장의 허름한 화장실이 아직도 기억난다. 요즘 군대에도 없던 일사로 철판이었는데 코를 찌르던 냄새를 잊을 수 없다. 야구장 시설은 열악했고 삼성이 실점하면 소주병이 날아다녔다."
야구는 경기장에 가서 보는 거지 지금처럼 TV로 보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같이 야구장에 갔던 친구들과 아직도 연락한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