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영 위원장은 희생과 헌신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보여주기식 쇼나 말뿐인 가식적인 희생과 헌신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진정성 있는 봉사로 주민들에게 다가가고 싶다. 권 위원장에게 정치란 첫 믿음, 끝까지—다.
1993년 2월 전역을 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기회가 봄처럼 찾아왔다. 어느 여성복지시설의 원장을 맡게 된 것이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회복지사로 졸업 후 임관하기 전 6개월 동안 장애영아보호시설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데다 나이는 젊었지만 군에서 행정장교로 근무한 것에 '원장'을 맡겨볼 만하다는 기대가 있었던 같다. 시설을 맡았을 때는 유휴여성들이 주류인 만큼 원생 대부분이 30대 중후반에서 40대로 연령대가 높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휴여성들이 점점 빠지고 가출한 여자아이들과 미혼모들이 늘어나면서 10대 중반부터 20대로 연령층이 낮아졌다.
여성복지 현장 속으로
권순영이 원장을 맡은 여성복지시설은 사회복지법인에 속했는데 서울시로부터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지금은 많은 지자체에서 여성복지시설을 운영하지만 그때만 해도 초창기여서 서울시가 민간사회복지법인에 위탁해 운영하는 여성복지시설이 몇 곳 없었다. 권순영의 두 번째 도전이었다.
2008년까지 16년 가까이 여자가출청소년,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여성, 성매매피해여성을 보호하고 자활을 돕는 것은 물론 생계형 구직 여성도 지원했다.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 처음 몇 년은 힘든 부분도 있었고 원장 자리가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군생활처럼 사회복지활동도 적성에 잘 맞았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충만했다.
사회복지사를 꿈꿨던 가출소녀
상습적으로 가출하는 여자아이들, 10대 미혼모들, 직업을 찾는 유휴여성들에 이르기까지 도움이 필요한 여성이면 모두 시설을 찾아왔다. 가출한 여자아이들은 먹고살 길이 없어 '티켓다방' 같은 유흥업소로 흘러들어가기 일쑤였다. 거기서도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나와 입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설은 잠시 보호하는 곳이 아니라 일정기간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먹고 자며 24시간 같이 생활하면서 심리치료도 하고 독립해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기술교육도 했다. 컴퓨터, 피부마사지, 칠보공예 같은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해 수료 후 자격증을 취득하게 하고, 진학을 원하면 검정고시학원에도 보내주었다. 하지만 아이들 대부분이 오래 머물지 못했다.
어린 미혼모도 종종 시설에 찾아왔는데 우리는 출산할 때까지만 보호할 수밖에 없어 출산 후에는 구세군이나 종교법인에서 운영하는 미혼모시설로 보내야 했다. 아기를 두고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기들 입양을 보내는 것도 해야 했다. 권순영은 그곳에서 10년 넘게 일하다 성매매여성쉼터로 옮겨 5년 더 일하게 됐는데, 원장으로 있는 동안 두 시설을 거쳐 간 여성이 2,000명이 넘는다. 시설에 오는 아이들 40~50%는 정신질환치료제를 복용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도 우울증치료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약을 한 번 먹기 시작하면 중독돼 끊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릴 때부터 먹던 약을 끊지 못해 그 후유증으로 공부도 취업도 할 수 없는 아이가 많다. 어린 시절 가정에서 받은 상처가 시설에 와서도 치유되지 않고 성인이 된 후에도 생계를 걱정하며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가정문제를 없앨 수 없다면 사후 해결책이라도 찾아야 한다.
'칼각' 행정장교 출신의 반격
20대에 원장이 된 권순영은 여성복지시설연합이 있었는데 원장 모임에 나가면 가장 어렸다. 50·60대는 젊은 축에 속했고, 70·80대 원장도 많았다. 그 틈바구니에서 결혼도 안 한 젊은 여자가 원장을 맡아 시설을 운영하는 걸 보고 다들 "한창 좋은 나인데 청춘이 아깝지 않느냐?"고 했지만 15년을 바치고 중년이 됐어도 권순영은 청춘이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군인으로 나라에 바치려고 한 청춘인데 도움이 필요한 불우한 여성들을 위해 바쳤으면 그보다 보람 있고 영광스러운 청춘이 또 있겠는가.아깝기는커녕 그때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 알지도 배우지도 못했을 많은 것을 깨달은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해결책은 없는지를 고민하고 찾아가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여정이었다.
그 시절엔 대놓고 촌지를 요구하는 공무원이 없지 않았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5월 어느 날, 시설 현황을 보고하기 위해 공문을 만들어 관할 지자체에 들고 갔다. 팩스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새로 온 원장으로 인사도 할 겸 직접 들고 갔는데 담당공무원이 대뜸 "요즘 딸기철인데 딸기라도 한 바구니 사다 씻어 가져오지 빈손으로 왔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공문 접수하러 오는데 딸기를 씻어 오라니! 처음엔 무슨 소리를 하는 줄도 몰랐다. 애써 웃어넘기기는 했는데 돌아와 생각하니 황당하고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시설을 대표하는 원장에게 어떻게 그런 무례한 말을 할 수 있는지 분노가 치밀었다. 공직사회가 이렇게 말단부터 썩어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여름에도 공문을 들고 갔는데 봄에 딸기 안 사왔다고 핀잔주던 공무원이 이번에는 능청스럽게도 "여름휴가를 가야 하는데 휴가비가 부족하다"고 했다. 실무자들은 "담당공무원 빈정상하게 해서 좋을 것 없다"며 "눈 한 번 딱 감고 얼마라도 쥐어주자"고도 했지만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담당공무원은 시설을 점검하거나 우리가 공문을 제출할 때마다 생트집을 잡았다.
주로 멀쩡한 위생상태를 문제삼으려고 했다. 권순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군복무 시절 '청소' 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지금도 고양시에서 '청소 잘하는 정치인'으로 소문이 나 있다. 부대에서 '위생점호'를 하듯 시설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유지했다. 더 이상 트집을 잡지 못하게 된 공무원이 얼마나 분하고 약이 올랐던지 누군가에게 "젊은 여자가 혼자서 다 해먹는다"며 푸념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훗날 권순영이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도 딸기사건과 무관하지 않게 됐다. 시의원이 되고 나서 보니 그 비위공무원은 퇴직하고 후임으로 왔던 실무자가 과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권순영은 비위공무원이 한 명이라도 나올 수 있는 행정시스템을 뜯어고치고 싶었다. 구태의연한 사고방식과 낡은 제도, 그리고 그것에 갇혀 있는 공무원들의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의원 시절 비리가 있어 보이는 곳에 강하게 파고들었던 것도 그래서다.
"정치를 왜 해야 하는가?" "왜 꼭 내가 해야 하는가?" 정치인이 되려고 했을 때 자신에게 이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해결하고 바꾸어야 할 것이 많아서"였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이 따라 나오게 마련이다. 정치가 해결할 문제라면 정치하는 사람에게 맡기면 되지, 왜 꼭 내가 해야 하는가?' 처음에는 권순영도 그렇게 생각했다. 현장의 목소리를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면 될 것이라고.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현장 경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컸다.
정치하는 이유
회복지법인도 부익부빈익빈이 극심했다. '형제복지원'의 악몽이 떠올랐다. 복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순수하게 지원해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해야 한다. 권순영은 정치가 '국민의 등을 긁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오래 경험해보면 가려운 부분이 어디인지 알게 된다. 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답답한 부분이 무엇이고, 원하는 것은 무언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유연성'이라는 것은 결국은 관행이나 매너리즘과 타협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사회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이다. 잘못된 관행을 깨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 권순영은 그 옛날 여성장교 면접장에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린다. "부러질 때 부러지더라도 강해지고 싶다."
정치든 기업이든 학문이든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하든 그 한 가지에 집중했다. 오래전 드라마로도 제작된 최인호 작가의 소설 《상도(商道)》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정치인' 홍경래가 '거상' 임상옥을 찾아가 "백성들을 구하려 난을 일으키려고 하니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임상옥은 앞에 있는 화로의 세 발 중 하나를 떼어 나머지 두 다리 중 하나에 붙여놓고 홍경래에게 "화로를 세우면 자금을 지원해주겠다"고 말했다. 결국 홍경래는 자금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화로의 세 발은 각각 명예, 재물, 권력을 의미한다. 정경유착은 언젠가는 패가망신하게 돼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마련이다. 정치를 하려면 정치에 봉사하고, 복지를 하려면 복지에 봉사해야 한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정치다. 군인도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고, 정치인도 국민에 봉사하는 것이다.

"정치도 사회복지의 연장"
지자체 단체장이 됐든 국회의원이 됐든 마찬가지다. 정치를 하면서 돈까지 벌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고위직이든 말단이든 중앙공무원이든 지방공무원이든 공직에 있으면 국민에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 복지시설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면 국민에 대한 봉사정신을 가져야지, 딸기를 받아먹고 촌지를 받아 여름휴가를 가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명예에 뜻을 두었으면 명예만 추구해야지, 돈과 권력까지 생각해선 안 된다. '삼발이 화로'가 알려주는 이치가 그렇다. 권순영은 다른 생각이 없다. 돈 벌려고 정치하는 것이 아니다. 당협을 운영하는 데 누가 돈 보태주는 것도 아니고, 당에서 돈을 내려주는 것도 아니다. 돈을 벌려면 사업을 했을 것이다.
군수가 되겠다, 도지사가 되겠다, 국회의원이 되겠다면서 많은 공약을 만들어내지만, 그보다 우선 "나는 정치만 하겠다"고 하면 시민이든 도민이든 국민이든 찍어줄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이면 정치만 해야지. 다른 건 생각하면 안 된다.
어떤 정치인은 권력에는 돈이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권력에 따라오는 돈은 반드시 탈이 나고 만다. '돈이 따라오게 하기 위해 권력을 잡겠다'는 생각으로 정치하겠다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정치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권순영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일치하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을 찾아내 열심히 하면 된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권순영에게는 정치가 그런 일이다. 해야 할 일이고, 할 수 있으며 하고 싶은 일이다. 돈과 명예는 중요하지 않다.
정치도 사회복지의 연장선상에서 대상의 범위가 넓어지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영향력을 미칠 위치에서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