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가을, 전등사 전시회 <생명의 숨결>에서 만난 그림들은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림을 보고 있으니 생명의 색과 빛의 에너지가 전해졌다. 내려가는 길에 방혜자 화백과 운명처럼 마주쳤다.

운명은 인연이 됐다. 2010년 내가 파리에 건너가 살게 되었을 때 다시 만났다. 유리 너머로 푸른 잎이 보이는 피라미드구조의 2층 화실에는 그림과 도구 들로 가득했다. 안쪽에는 요가 깔려 있는 방이 있었고 작은 부엌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은 작고 가냘픈 체구였는데 전시회 때마다 파스텔톤의 고운 생활한복을 입으셨다.

2012년 내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문안을 오셔서 누워있는 손을 꼭 잡고 기도해 주셨는데 따듯한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이 물결처럼 흘러들었다. 2013년 여름에는 프랑스 남부 아주(Ajoux) 시골집에 머물며 요양했는데 선생님은 기수련을 권하시면서 시범을 보여주셨다. "나는 기쁨, 나는 평화, 나는 사랑, 나는 행복. 나는 건강하다." 선생님의 주문을 따라 중얼거렸다.

2022년 여름, 선생님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로 뵈러 갔다. 하루 동안의 재회였지만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함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나의 살던 고향>을 불러드리면 선생님도 조용히 따라 부르셨다. 동화책도 읽어 드리고 지헌 김기철 선생의 편지도 읽어드렸다. 잠시 누워 쉬고 계셨던 선생님이 스르르 잠에 빠져 들었다.

입고 있던 하얀 겉옷을 덮어드리고 조용히 나와 산책하고 돌아와 보니 선생님께서 그 옷을 입고 계셨다. 수줍게 웃고 계신 선생님은 하얀 날개옷을 입은 듯했다. 

방혜자(1937-2022) 화백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파리로 건너가 벽화와 판화를 배웠다. 결혼 후 파리를 중심으로 미국, 캐나다, 스웨덴, 벨기에, 스위스, 일본 등지에서 90회에 달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어릴 적 시냇가에서 비친 햇빛을 화폭에 담는 데 전념한 '빛의 화가'다. 자연의 재료로 우주와 대지, 생명과 빛을 한지에 담아냈다. 유작이 2021년 샤르트르대성당 종교참사회의실 스테인드글라스창으로 완성됐다. 모나코 국제현대예술제에서 '성(聖)미술상', 몽루주와 라 훼리예르 시(市)에서는 예술훈장을 받았다. 서울대와 성심여대 강단에 섰으며 2008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인상 특별상, 201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2012년 제11회 한불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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