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 동안 이산(離散)의 미술사가 탄생했다. 전시회는 월북작가의 유산을 다시 보여주는 기획으로 통일의 미술사로 가는 길을 관객에게 안내한다. 

이쾌대,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린 포로

이쾌대가 중절모에 두루마기를 입고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다. 서양의 팔레트와 동양의 붓을 양손에 들었고 이국적인 풍경과 항아리를 머리에 얹고 가는 한국의 풍경이 함께 있다.

LACMA(LA카운티미술관)에 전시됐을 때 방탄소년단 RM이 SNS에 인증샷을 남기며 관심을 모았다.

이쾌대는 6・25 때 피란하지 못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려야 했고 수복 후 거제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림과 화구를 모두 팔아도 괜찮으니 아이들 배만 곯지 않게 해달라"는 편지를 남기고 포로교환 때 북을 선택했고 1962년 이후 모든 기록이 사라진 채 생을 마감했다. 작가의 그림은 어려운 생활에도 목숨같이 남편의 작품을 지켜낸 아내 유갑봉 덕에 모습을 드러냈다.

배운성, 유럽 화단이 주목한 대가

배운성은 17명의 대가족 그림에 자신을 그려 넣었다. 왼쪽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옆모습의 남자가 배운성이다. 열다섯 살 때부터 이 집에 얹혀 살다 동갑인 그집 아들이 독일로 유학갈 때 함께 갈 기회를 얻었다.

베를린예술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폴란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와 체코에서도 전시회를 열며 유럽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 수복 후 북을 선택하며 우리 미술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2013년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가족도>는 1935년 독일 함부르크민속박물관 개인전에도 출품됐다. 파리를 방문한 대전프랑스문화원장이 골동품가게에서 그림을 발견하고 다수를 구입해오며 다시 빛을 보게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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