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2월 어느 일요일 벨기에 '루벤스의 집'. 스물두 살 연인,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은 상아조각상 〈아담과 이브〉를 훔쳐 와 자기 집 다락에 전시한다. 아름다운 보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자신들만의 컬렉션을 꾸린 것이다. 바라보고 쓰다듬고 사랑하고 또 훔친다.
스테판 브라이트비저(Stéphane Breitwieser)는 예술품도둑이다. 1994년부터 2001년까지 유럽 전역에서 200여 회에 걸쳐 300점 이상 훔쳤고, 2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상 가장 많은 예술작품을 훔쳤다. 브라이트비저는 변장하지 않았고, 몰래 들어가지도 않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대낮에 당당하게 입장했다. 도구는 스위스 아미나이프뿐. 무엇보다 돈 때문에 훔치지 않았다.
《예술 도둑》은 2023년 출간 즉시 "지금 가장 주목할 이야기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아마존과 〈뉴요커〉, 〈워싱턴포스트〉 등 수많은 매체가 선정한 '올해의 책'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을 대표하는 저널리스트 마이클 핀클(Michael Finkel)은 예술을 사랑한 남자와 스릴을 사랑한 여자와 아들을 사랑한 엄마 이야기로 무장한, 그 자체로 한 편의 유려한 예술작품을 선보인다. 수많은 이와 주고받은 인터뷰, 광범위한 연구와 치밀한 취재로 소설보다 소설 같은 범죄사건을 이야기로 엮어냈다.

브라이트비저는 대저택에서 자라며 남부러울 것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또래들과 놀기보다 박물관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면 기분이 좋아지는 아이였다. 그림, 조각상, 오래된 가구, 저마다의 색채로 빛나는 유물을 보면 마음을 빼앗겨 얼어붙곤 했다. 브라이트비저는 이를 가리켜 "과거로 피신한 시간"이라 했다.
그래서 자신은 야만적인 도둑과 한참 거리가 멀고 감상적이고 날카로우며 안목을 지닌 진정한 미술품수집가로 불리기를 원하며 나아가 "예술해방가"를 자칭한다. "돈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에 둘러싸이고자 훔쳤다. 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받은 자다."
그래서 떳떳하고 양심의 가책도 없다. 브라이트비저에게 박물관은 감옥이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간에서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도 없다. 자세히 좀 볼라치면 등 뒤를 셀카봉이 쿡쿡 눌러 방해받은 경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강렬히 마음을 울리는 작품 앞에 서 있어도 박물관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소파나 안락의자에 몸을 기댈 수 있어야 한다. 원하면 술도 한 모금 마셔도 좋다. 간식도 필요하다. 그리고 언제나 손을 뻗으면 작품에 닿을 수 있고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한다. 그제야 예술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작품을 훔친 이유는 한 가지다.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사실 누구나 브라이트비저처럼 생각한다. '이 그림, 며칠이라도 내 방에 걸고 싶다.' 그도 아니면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에는 사로잡힌다. 그러나 머물고 지켜야 할 선을 넘진 않는다. 고상한 도둑의 열변에 주목하던 핀클은 심리학자와 박물관 관계자, 시민공동체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인다. 브라이트비저는 대체 왜 그런 걸까? 도벽도 아니고 스탕달증후군도 아니다.
"자기도취에 빠진 나르시시스트"라는 진단도 있지만, 그가 저지른 범죄의 이유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지적능력도 문제가 없고 사회불안장애를 겪지도 않는다. 그럼 왜 자신의 경험을 위해 다른 이의 경험을 망치는 것일까? "누구나 인류 전체의 유산을 제한 없이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작품을 보존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는 성숙한 의식이 왜 그에겐 허망하고 무용했을까?
예술의 힘, 그리고 애초에 예술이란 대관절 무어길래? 핀클은 브라이트비저의 치밀한 범죄 여정을 따라가며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는 '예술소유욕'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기묘한 도둑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공범이 돼버리고 마는 이유
브라이트비저 옆에는 연인이자 범죄 파트너인 앤 캐서린 클레인클라우스(Anne-Catherine Kleinklaus)가 있다. 캐서린은 지인들에게 "브라이트비저를 만나기 전 단조로운 삶을 살았다"고 말한 바 있다. 도둑과 사랑에 빠진 캐서린은 수많은 박물관에서 수도 없이 망을 봤고 대담한 예술품 절도 사건의 공범이 됐다. "우리 둘만의 우주가 따로 존재하죠."
브라이트비저의 어머니 미레유 스텐겔(Mireille Stengel)도 정상은 아니다. 아들이 무슨 짓을 해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넘어갔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했던 브라이트비저는 진정한 아름다움의 뮤즈,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은 연인과 행복했다. 다락방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천상의 광채와 함께 가슴 벅차게 하루를 시작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랬듯 자신의 방에서도 옛 영광을 느꼈다. 그러나 집착과 강박은 고통스러운 사랑으로 이어졌다. 함께 왕국에 머물던 연인과 그 모든 범죄에 그리도 관대하던 어머니는 종국에 이르러 믿기 힘든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한 '사랑이야기'는 그가 훔친 수많은 작품만큼이나 매혹적이다. 연결되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둘러싼 온갖 형태의 사랑은 우리를 상상하지도 못한 극단으로 몰아갈 수 있음을 핀클은 보여준다. 우리가 이 기묘한 도둑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공범이 돼버리고 마는 이유다.
《예술 도둑》은 걸작이다. 핀클은 인간 본연의 감정과 욕망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며 우리의 마음을 황홀하게 휘젓는다. 예술과 미스터리, 그리고 복잡한 인간 심리를 사랑하는 이들을 유혹한다. 핀클은 현대 사회와 격리된 채 27년간 홀로 살아온 이를 추적한 《숲속의 은둔자》(2017)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자신이 경험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쓴 《트루스토리》(2005)는 에드거상 최우수 논픽션(범죄 부문) 후보에 올랐고, 2015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다.
50개 국 이상에서 취재를 해왔으며 〈내셔널지오그래픽〉, 〈뉴욕타임스매거진〉, 〈애틀랜틱〉, 〈GQ〉, 〈롤링스톤〉, 〈에스콰이어〉, 〈베니티페어〉 등에 기고했다. 옮긴이 염지선은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옮긴 책으로 《완경선언》,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우리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 《나 오늘 왜 그랬지?》, 《디자인, 경영을 만나다》 등이 있다.
"예술작품은 왜 사람들을 사로잡는 걸까? 예술의 힘, 그리고 예술은 뭘까? 꼼꼼한 취재와 마술처럼 유려한 문장, 그리고 이런 묵직한 질문들이 결합한 결과는 황홀하다."

『열정적인 한 남자가 값진 보물을 훔치고자 어찌나 미친 듯이 범죄를 저지르는지 빠져들게 된다. 주인공은 천재 같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하다.』 _아마존 '올해의 책' 추천평
『이 책을 읽기 위해 필요한 키워드는 세 가지다. 텅 빈 벽, 공허한 마음, 그리고 아름다움. 책은 마음의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아름다움을 훔치는 도둑의 일대기다. 주인공이 절도를 거듭할 때마다 미술관 벽과 진열장은 비게 되지만 비어 있던 그의 다락방 벽과 마음에는 아름다움이 깃들게 된다. 상궤를 벗어난 병적인 아름다움이. 누구에게나 고통의 순간 도망칠 자신만의 세계가 필요한데, 그 세계를 어떤 것들로 채울 것인가는 결국 선택의 문제다. 우리가 이 기묘한 도둑을 비난하면서도 이해하게 되는 것은 모두의 마음속에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채우고픈 공허가 있기 때문이다. 훔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것을 접한 적 있는 모든 이에게 권한다.』 _곽아람,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나의 뉴욕 수업》 저자
『독자는 주인공의 행태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도 분명 몇몇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공범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가 붙잡힐까 봐 겁내고, 아름다움을 온전히 독점하고 곁에 두는 은밀한 시간과 공간을 부러워하게 된다. 그리고 독자는 이 도둑이 미학적 열망 때문에 도둑질을 저질렀다는 주장을 반박하려다 심오한 수수께끼를 맞닥뜨리게 된다. 미학적 열망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예술작품은 왜 사람들을 사로잡는 걸까? 예술의 힘은, 그리고 예술은 뭘까? 혀를 내두르게 하는 꼼꼼한 취재와 마술처럼 유려한 문장, 그리고 이런 묵직한 질문들이 결합한 결과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_장강명(소설가)
『〈도둑들〉을 만든 최동훈 감독이 술자리에서 흥미로운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교수님, 미술관에 갔을 때 딱 한 작품만 훔친다면 어떤 작품일까 생각하면서 감상해보세요. 그림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겁니다." 정말로 그 후 내 미술관 감상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 됐다. 몰래 집에 가져가 평생 나만 훔쳐볼 그림을 찾는다는 건 은밀한 미학적 쾌감을 전해주었다. 팔 수도 없는 장물이라 오로지 작품과 나와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흥미로운 경험은 내게 새로운 미적 욕망을 만들어냈다. 예술에 대한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가장 비뚤어진 방식으로 탐해온 예술 도둑을 통해 미학과 윤리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 책! 근래에 읽은 가장 흥미로운 예술 서적이다.』 _정재승, 뇌과학자, 《열두 발자국》 《과학콘서트》 저자
『17세기 북유럽 작품에 매력을 느끼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독학으로 미술사 공부를 이어간 기묘한 도둑들. 무엇인가를 향한 지극한 사랑. 그런데 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삶의 함정 같은 이 '미친' 사랑을,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_이세라, 아츠인유 대표, 《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 저자
『이 책은 은밀한 상상을 자극한다. 미술관에 갇힌 예술을 해방하고, 거장의 작품을 곁에 두는 삶. 그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낸 어린 도둑의 신념이 지금 우리에게 질문한다. 미학이 윤리보다 우월할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울리는 강렬한 작품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_이지안, 미술치료사, 도슨트
『이 도둑은 우리 마음도 훔친다.』 _〈뉴요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매혹적인 심리 스릴러. 《예술 도둑》은 프랑스 추리 소설 특유의 긴장감이 있다. 매그레 경감과 명탐정 푸아로가 범인의 뒤를 바싹 쫓는 느낌이다. 책을 읽는 동안 범죄자를 향한 동정심과 혐오감이 공존한다. 그리고 결말은 충격 그 자체다. 핀클은 그야말로 이야기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잡으면 내려놓기 힘든 책이다.』 _〈월스트리트 저널〉
『매혹적이다. 핀클의 생동감 넘치고 다채로운 문체 덕분에 마치 살인 미스터리를 읽는 듯한 강렬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시체가 아니라 작품이다. 《예술 도둑》은 절도에 관한 책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_〈워싱턴포스트〉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예술 도둑》이라는 책 자체도 자신감 넘치고 역동적이며 타이밍이 절묘하다. 끝없는 긴장과 놀라움의 연속이다.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득은 엄청난 범죄 행각을, 핀클은 그야말로 멋지게 그려낸다. 전형적인 기승전결 구조가 아닌 갈수록 미쳐가는 이야기다. 핀클의 책이 이토록 즐거운 건, 브라이트비저의 도둑질 전략이 한 번도 빠짐없이 미친 짓이라서다.』 _캐스린 슐츠, 《상실과 발견》 저자
『매혹적이면서도 복잡한 주인공의 삶을 놀랍고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다. 집착과 잘못된 재능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_커크 월리스 존슨, 《깃털 도둑》 저자
관광객 무리가 여전히 문제다. 힐끔 보니 모두 어떤 그림 앞에 모여 헤드폰을 끼고 오디오 가이드를 듣는 중이다. 이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결전의 순간이다. 누구 한 명이라도 고개를 들면 모든 게 끝장이다. 브라이트비저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보통 도둑은 훔치다 잡히지 않는다. 망설이다 잡힌다. 26쪽
그림이 하도 많다 보니 다락 전체가 색으로 소용돌이친다. 거기에 상아의 광채와 은이 내뿜는 빛이 더해져 색은 더욱 강조되고 반짝이는 금빛이 화려함을 극대화한다. 별 볼 일 없는 동네의 특별할 것 없는 집 다락. 예술 전문 기자들은 이곳에 숨겨둔 작품의 가치를 모두 합쳐 돈으로 환산하면 약 20억 달러(2조 7,000억 원)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한다.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 두 사람은 환상 속 세계를 뛰어넘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보물 상자 안에 사는 삶이라니. 31쪽
커다란 포스터 침대에 깔린 시트가 마치 빨간 스포츠카 같다. 앤 캐서린은 침대 위에 편안히 늘어져 누워 있다. 물결처럼 하늘하늘한 검은색 실크 잠옷을 입고 무심히 웃는다. 방 안 가득 채운 보물을 만끽하듯 무대 위 배우처럼 양팔을 벌리더니 이내 선언한다. "여기가 바로 내 왕국이야." 브라이트비저는 이 장면을 영상으로 촬영 중이고 그녀는 손으로 허공에 키스를 보낸다. 50쪽
심리치료사 미셸 슈미트는 "스테판 브라이트비저의 특별한 점이라면 너무 평범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커다란 눈만은 남들과 다르다. 날카로운 눈빛과 푸른 사파이어색 눈동자를 가졌고 두꺼운 눈썹 때문에 이 부분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영리한 방법으로 여러 은둔술을 발휘하지만 브라이트비저의 눈은 마음의 창이자문이며, 그의 많은 것을 드러낸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기쁘거나 슬플 때는 금방 눈물을 흘린다. 실제로 눈물이 많은 편이다. 79쪽
둘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책자에서 〈클레브의 시빌〉을 꺼내 소중하게 손바닥으로 받쳐 든다. 액자도, 유리도, 관람객도, 경비원도 없다. 그림의 뒷면은 그동안 이 초상화를 소유했던 가문의 밀랍 인장이 여러 개 찍혀 있어 오돌토돌하다. 그림이 지나온 450년의 역사를 말해준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을 손에 들고 있자니 만족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듯하다. 마침내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생일 선물을 온전히 맛보게 되는 순간이다. 105쪽
브라이트비저는 앤 캐서린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낚아채 마침 거실로 들어오는 어머니를 비추며 렌즈를 가까이 당긴다. 턱을 치켜들고 척추를 곧게 편 채 우아하고 침착한 모습이다. "방금 내가 한 말 들었어요?" 새해 목표가 수백만 달러어치의 예술품을 훔치는 거라고 한 말을 어머니가 들었는지 대놓고 묻는다. 브라이트비저는 이미 대답을 안다. 110쪽
박물관에서 16세기 제단화 한 쌍을 훔쳐서 나왔는데 경찰관 한 명이 차 옆에 와 있어 깜짝 놀랐다. 60센티미터 정도 되는 길이에 너비는 30센티미터 정도인 제단화를 브라이트비저의 외투 아래 양쪽에 하나씩 숨겨 갖고 있던 채였다. 그림이 떨어질까 봐 양팔을 어색하게 몸에 붙이고 있으므로 어디 앉을 수도 없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지만 두 사람은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며 공손하게 무슨 일인지 묻는다. 경찰은 주차위반으로 접수 중이라고 설명한다. 브라이트비저는 이 와중에도 돈을 아끼려고 주차비를 내지 않고 다녀왔다. 보통의 도둑이라면 이 상황에서 안심하고 과태료를 내겠지만 브라이트비저는 다르다. 무모하게도 한껏 어정쩡한 자세로 이미 발부된 주차 딱지를 취소해 달라고 그 자리에서 경찰과 언쟁을 벌인다. 125쪽
아름다움이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다. 정말 그럴까?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 신경과학 교수 세미르 제키(Semir Zeki)는 MRI 촬영을 이용해 실험 참가자들이 화면에 비친 예술 작품을 보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신경 활동을 추적했다. 그 결과 뇌에서 미적 반응이 일어나는 정확한 지점을 알아냈다. 눈 뒤에 위치한 콩알만 한 크기의 엽(葉)이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그다지 시적이진 않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는 사람의 내측 안와전두피질(medial orbital-frontal cortex)에 달려 있다. 150쪽
차안 공기는 얼어붙은 듯 차갑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박물관에 도착해 주차를 할 때쯤 브라이트비저가 생기를 되찾는다. 작곡가 바그너가 186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살았던 저택의 수려한 경관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 박물관은 루체른 호수를 둘러싼 아름다운 도시공원에 있다. 호수 쪽으로 튀어나온 곶에 위치하고 주변은 빙하가 덮인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앤 캐서린이 자신의 자동차 문을 연다. 가방에는 손수건과 지문을 닦을 알코올 병이 들어 있다. 브라이트비저는 이 순간, 두 사람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차에 있어. 지문만 지우고 바로 올 거야.” 앤 캐서린이 말한다. “난 잠깐 산책 좀 하고 있을게. 걱정 마.” 브라이트비저가 따라 내리며 녹색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자동차 열쇠를 앤 캐서린에게 건네면서 몸을 숙여 키스를 한다. 이 키스가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온기를 불어넣기를 바라며. 202쪽
판사는 시선을 사로잡는 네모난 안경을 썼고 허튼소리는 단 한 마디도 용납하지 않을 듯이 위압적인 모습이다. 옆에는 세 명의 여성과 남성 한 명으로 이루어진 배심원단이 앉아 있다. 모두 중년쯤으로 보이며 사건의 판결과 형량 결정에 참여한다. 브라이트비저 뒤에는 변호사가 앉는다. 옷을 잘 차려입었고 꼿꼿한 자세가 어딘지 귀족적으로 느껴진다. 떼 지어 몰려온 언론사 기자들을 위해 의자가 빼곡히 놓여 있다. 브라이트비저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모조리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낀다. 247쪽
삶에서 브라이트비저가 만난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리만큼 그의 도둑질에 관대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메쉴르, 그리고 앤 캐서린도 모두 그랬다. 관대한 정도가 아니라 브라이트비저만큼 예술을 사랑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예술 전문 기자 노스는 "이 무리에는 부모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지적한다. "'도둑질을 멈춰라', '작품을 돌려놓아라', '어른답게 행동해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바로 이 점이 브라이트비저의 문제였다.” 28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