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이임광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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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7.16 16:52
  • 수정 2025.07.22 14:36

큰별산악人[2] 박미현 총무···아이 넷 키우며 온 동네 챙기는 똑순이 '생활정치가'

여섯 살 때 아빠가 삼청교육대 끌려가는 것 목도···타지서 징집 대상 된 삼촌 대신 고초
'굽은 다리'로 상경한 아빠의 도전···집안 일 도맡아 일찍 철든 순댓국집 똑순이
4남매 데리고 DJ 추모···동병상련으로 정치에 눈 뜨고 지지한 아빠 그리워
여섯 식구 살림 다 챙기고 지역봉사활동···8개 단체서 맹활약하는 '여자 홍반장'
"부녀가정에 각별한 관심과 지원 절실"···글로벌e '이모톡톡' 출범에 결정적 아이디어
"정치, 언제든 우리 생활·삶·생명 위협할 수도"···'국민생활정치가시대' 열어야
정치는 정치인 아니라 국민이 한다···"정치 침묵하면 나쁜 정치인들에 이용 당해"

1980년 늦여름 아침 전남 무안 일로읍의 한 농가. 여섯 살 미현이는 마루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오빠와 언니들은 학교에 가고 엄마와 할머니는 밭에 나가 아빠가 막내딸 밥을 먹이는 중이었다. 대문 밖에서 들리던 자동차소리가 멎더니 아저씨 둘이 마당으로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여가 박○○ 집이지요?"

삼촌이었다. 본 적은 없지만 미현이는 할머니가 입술이 닳도록 걱정하던 삼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나 동상인디 왜그요?"

"어딨당가요?"

수저를 놓고 마당으로 내려간 아빠에게 아저씨 하나가 다그쳤다.

"안 들어온 지 솔찮이 됐어라."

"꼼차불다 큰일나요!"

"참말로 모른당께요!"

"안 되겄그마."

'철컥-'

아저씨 하나가 아빠 팔을 잡아당기자 다른 아저씨가 아빠 두 손에 번쩍거리는 쇠팔찌를 채웠다.

"서(署)로 갑시다." 

아빠는 끌려가면서 고개를 돌려 막내딸을 보았다. 어린 것이 놀랐을까 걱정이 됐다. 미현이는 꼼짝도 못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 울음은커녕 "엄마"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미현이는 그렇게 아빠를 도둑맞았다. 그날 저녁 큰언니가 "학교 가는 길에 자동차 한 대가 집 쪽에서 나오는 걸 봤는데 뒷자리에 아빠가 타고 있었다"고 했다. 

아빠는 11월이 돼서야 낙엽처럼 돌아왔다. 석 달 전 모습이 아니었다. 야위고 다리를 절었다. 오른 무릎을 펴지 못해 지팡이 없이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어른들 말로는 군대 같은 곳에 가서 다친 거라 했다. 돌아가실 때까지 미현이가 기억하는 아빠는 굽은 다리를 하고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다. 

조금 철들어 아빠에 관해 엿들은 어른들 말 중 '삼청교육대'가 있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삼청교육대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듣고 엄마한테 "아빠도 삼청교육대 갔다 온 거 아니냐?"고 물었다가 혼이 났다. 엄마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누구한테도 그 얘길 해선 안 된다"고 단속했다. 미현이는 어른이 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 옛날 아빠를 도둑맞은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됐다.

12·12내란을 일으킨 후 1980년 5월 광주를 짓밟고 집권한 전두환은 '사회정화'를 명목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국민들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해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민주인사는 물론 무고한 시민까지 잡아들였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4만여 명 중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군, 신군부 반대 시위에 가담한 대학생, 신군부 지지 성명을 거부한 불교계 인사, 김영삼·김대중 등 재야 민주인사 지지자, 노조 간부는 물론이고 고아와 가출청소년, 학비 미납 학생, 저학력자, 사회부적응자, 우울장애 환자, 지적장애자가 대거 포함됐다. 평범한 여성들을 윤락업소 종사자로 몰아 체포한 사례도 있다.

타지에 있던 미현이 삼촌도 삼청교육대 징집 대상이 됐다. 삼촌은 경찰들이 들이닥칠까 무안 집에도 올 수 없었다. 할당량을 채우려 혈안이 된 경찰은 삼촌 대신 아빠를 잡아가기로 했다. 형이라고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갈 순 없어 '주민의 손가락질을 받는 자(징집 대상 항목 중 하나였다)'란 누명을 씌워 마을사람들을 겁박해 서명하게 했다. 어린 5남매를 키우는 가장을 백주에 그것도 여섯 살배기 딸이 보는 앞에서 수갑까지 채워 납치한 만행은 그렇게 쉽게 저질러졌다.

삼청교육대에서 아빠는 고문에 가까운 훈련과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어깨가 부서질 듯한 목봉체조는 기본이고 진압봉으로 얻어맞고 군용차에 묶여 끌려다니기도 했으며 인분통에도 들어가야 했다. 탈출을 시도했다간 가차 없이 사살됐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아빠를 버티게 한 건 가족이었다. 동생이 잡혀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과 살아서 어머니와 처자식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었다. 결국 무릎이 망가져 불구가 돼서야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 이가 적지 않았으니 불구라도 생환한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까. 엄마와 할머니는 기가 막혔다.

할머니는 6남매를 낳았는데 첫째, 둘째 아들과 딸 둘을 잃고 아빠와 삼촌 두 아들만 남았다. 아빠는 공부를 잘해 가난한 수재들이 가는 목포상고를 나오고도 친구들처럼 대지에 나가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어야 했다. 장남을 품에 두고 싶은 어머니의 바람을 따른 것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비극이 없었을까.

불구가 된 아빠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생계만큼이나 힘든 게 주위 시선이었다. 삼청교육대는 몸에만 상처를 남긴 게 아니었다. '조폭·깡패·건달', '불온선동자', '사회 풍토 문란과 사회질서 저해 사범'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겁박에 못 이겼다지만 음해한 이웃들에 대한 야속함도 아빠는 견디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자식들이 손가락질 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빠는 상경을 결심했다.

삼청교육대에서 나온 이듬해 아빠와 엄마는 큰오빠, 큰언니, 막내 미현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변두리 방화동에 단칸방을 얻었다. 미현이 외삼촌, 그러니까 엄마의 남동생이 공항시장에서 순댓국집을 하고 있어 그곳에 정착했다. 엄마와 아빠는 좌판을 깔고 채소장사를 시작했다.

1년쯤 지나 미현이네도 조그만 순댓국집을 열었다. 외삼촌이 순대 뽑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아빠가 집에서 뽑은 순대로 엄마가 국을 끓여 팔았다. 순대 뽑기는 앉아서도 할 수 있어 다리가 불편한 아빠에게 그나마 맞는 일이었다.

밥도 집에서 지어 날랐는데 큰오빠는 학교에 다녔고 큰언니도 중학교 졸업 후 공장에 다녀 초등학생인 미현이가 순대와 밥 배달을 도맡았다. 한 번은 밥을 가득 담은 통을 머리에 이고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무릎이 깨진 것보다 땅바닥에 밥이 엎어진 게 속상해 펑펑 울었다. 훗날 엄마는 "어린 게 밥통을 이고 다녀 키가 못 자랐다"며 미안해했다. 가난은 아이를 일찍 철들게 했고 미현이는 키보다 큰 아이였다. 중학생 땐 순대 뽑기부터 돼지머리를 해체해 누르는 것까지 터득한 '똑순이'가 됐다.

아빠의 굽은 다리는 굳어만 갔다. 무릎이 커졌고 발목은 가늘어졌다. 왼 다리로 지탱하다 보니 왼 다리 관절마저 못 쓸 지경이 됐다. 2006년 왼 다리를 수술했는데 성공적이었다. 아빠는 한껏 고무돼 오른 다리도 고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아빠와 엄마는 25년 만에 고향 무안으로 내려갔다. 금의환향까진 아니라도 굽은 다리로 서울에 올라가 5남매를 무탈하게 키워냈으니 그만하면 성공한 셈이었다. 이제 좀 편해질까 했는데 아빠는 오른 다리 수술을 받다 그만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의사는 "오랫동안 마이신(항생제)을 과다 복용한 게 화근이 됐다"고 했다. 아빠는 다리 때문에도 그랬지만 앉아서 순대를 뽑느라 어깨 통증이 심해 진통제와 항생제를 달고 살았다.

전두환정권이 발급한 삼청교육대 수료증은 '낙인'이었다. 전과자 취급을 한 것이다. 수료증에 '수료증은 항시 휴대해야 한다. 수료자는 재범 시 엄중 처단된다'고 적혀 있었고 1990년대 초까지도 주민등록등·초본 상단에 '삼청교육 순화교육 이수자'란 문구가 있었다.

전두환 직인이 찍힌 '불량배 순화계획에 따른 부수처리 지침'. 전두환이 1980년 삼청교육대사업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핵심 사업'으로 규정한 문서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이던 전두환은 "본인의 과오를 회개시키고 정상적 사회인으로 만들기 위한 순화교육을 개과천선을 위한 정신교육과 병행해 강한 육체적 훈련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진실화해위 제공] 오른쪽은 한강태(68) 씨가 지니고 다니던 삼청교육대 수료증으로 전과자 취급을 한 '낙인'이었다.
전두환 직인이 찍힌 '불량배 순화계획에 따른 부수처리 지침'. 전두환이 1980년 삼청교육대사업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핵심 사업'으로 규정한 문서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이던 전두환은 "본인의 과오를 회개시키고 정상적 사회인으로 만들기 위한 순화교육을 개과천선을 위한 정신교육과 병행해 강한 육체적 훈련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진실화해위 제공] 오른쪽은 한강태(68) 씨가 지니고 다니던 삼청교육대 수료증으로 전과자 취급을 한 '낙인'이었다.

아빠는 그 후로도 수료증을 가지고 있었다.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였지만 언젠간 진실이 규명돼 명예를 회복할 날이 올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2002년 삼청교육대의 실상을 파헤친 <MBC> 탐사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버림받은 희생, 삼청교육대) 취재에 수료증을 보여주고 증언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22년 삼청교육대사건을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인권 침해 사건'으로 규정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15년이 지난 후였다. 아빠가 이긴 것이다.

2009년 8월 서울광장 김대중 대통령 분향소. 검정 옷차림의 키 작은 여자가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나와 두 배 반 절을 했다. 아이들도 엄마를 따라 나란히 절을 올렸다. 영정을 바라보는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들 눈망울에도 이슬이 맺혔다. 기자들이 몰려들고 한 기자가 물었다. "김대중 대통령님과 어떤 관계가 있으신가요?" 박미현은 대답 없이 울기만 했다. 서거 1주기 때도 동작동 현충원에 가 참배를 했다. 그땐 아이 넷을 데리고 갔다. 그 사이 하나를 더 낳은 것이다.

박미현이 아이들까지 데리고 김 대통령을 추모한 것은 서거 1년 전 돌아가신 아빠 때문이었다. 삼청교육대에서 돌아온 후 아빠는 정치에 눈을 떴다. 평범한 농부가 DJ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것은 동병상련 때문이다. 독재에 맞서다 고문을 받아 불구가 되고 납치돼 수장될 뻔 한 것도 모자라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은 정치인의 삶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독재가 정치인이 아닌 자신 같은 농부의 삶도 송두리째 망가뜨릴 수 있음도 통감했다. 아빠는 정치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DJ와 운명을 같이한다 여기고 살았다. 아빠는 DJ의 목포상고 후배이기도 했다.

아빠는 '생활정치가'로 불의와 싸울 준비가 돼 있었다. 미현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친구가 '전라도 깽깽이'라고 놀린 적이 있다.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저는 김대중 대통령을 비하하는 것임을 미현이도 알고 있었다. 아빠를 욕하는 것 같아 친구의 머리채를 잡고 한 움큼 뜯어버렸는데 담임이 부모님을 호출했다. 아빠가 온다고 해서 싸운 걸 후회했다.

'참을 걸. '전라도 깽깽이' 얘기를 들으면 아빠가 얼마나 속상할까.'

반전이 일어났다. 학교에 와서 자초지종을 들은 아빠는 "도대체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했기에 어린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느냐?"며 담임을 꾸짖었다. 

아빠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막내딸까지 결혼식장에서 손을 잡고 행진했다. 한쪽 발이 닿지 않는 혼주석에 1시간 넘도록 앉아 있는 것만도 아빠에겐 크나큰 고통이었다.

박미현은 큰별산악회 총무를 맡고 있다. 어릴 적 순댓국집 딸로 몸에 밴 억척과 아이 넷을 키우는 주부 9단의 저력으로 산악회 살림을 알뜰살뜰 꾸리고 있다.

박미현은 키는 작아도 발은 넓다.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큰별나눔봉사회 홍보 차장, 강서구자율방범연합회 봉사국장, 강서구새마을직·공장협의회 부총무, 화곡3분회청소년육성회 부회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청년위원회 자문위원, 화원중 학부모회장으로 맹활약 중이다. 외모도 이름도 그렇고 박미현을 보면 '슈퍼땅콩' 김미현 프로가 떠오른다. 여섯 식구 살림 다 하고 온 동네를 '홍반장'처럼 챙기고 다니는 박미현은 '슈퍼땅콩'을 넘어 '작은킹콩'이다. 

아래 왼쪽은 박경숙 큰별나눔봉사회장과 함께
아래 왼쪽은 박경숙 큰별나눔봉사회장과 함께

네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달음식은 먹인 적이 거의 없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빠른 손놀림으로 밥이고 반찬이고 뚝딱 차려놓고 나와 활동한다. 돈도 돈이지만 그보단 어릴 때 사무친 한 때문이다.

"몸이 불편한 아빠, 장사하는 엄마, 공부하는 오빠까지 밥해 놓고 기다려야 했어요. 엄마가 해주는 밥은 못 먹고 자랐어도 나중에 엄마가 되면 아이들 밥은 꼭 해주겠다 다짐했죠. 아이 넷 모두 엄마가 해준 밥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몇 해 전 혹 정치를 하게 되면 뭐부터 바꾸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역시 아이들 얘기였다.

"한부모가정 중에도 '부녀가정'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아빠 혼자서 딸아이를 키우는 건 아빠와 딸 모두에게 힘든 일입니다."

박미현의 아이디어는 <글로벌e>가 강서교육복지센터와 2년째 추진 중인 부녀가정 상담지원 사업 '이모톡톡'의 모티브가 됐다.

2024년 고주형 글로벌e 대표와 박자양 강서교육복지센터장이 부녀가정상담지원사업 '이모톡톡'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박미현이 '이모톡톡'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2024년 고주형 글로벌e 대표와 박자양 강서교육복지센터장이 부녀가정상담지원사업 '이모톡톡'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박미현이 '이모톡톡'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박미현도 생활정치가다.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하는 것'이란 어느 정치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국민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치생활'을 하고 있는 거죠." 

무고한 농부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시대가 아니라 해도 정치는 언제든 우리 생활을, 삶을,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 누구든 수학여행을 가다가, 축제에 놀러갔다가, 군복무 중 구명조끼 없이 급류에 뛰어들었다가 변을 당할 수 있다.

"군대 간 아들이 계엄이 뭔지도 모른 채 계엄군이 될 수도 있죠."

동네에선 "정치 얘기는 하지 말라"는 게 불문율처럼 돼 있다. 결국엔 꼭 싸움이 난다는 게 이유다. 박미현의 생각은 다르다.

"사람들과 다투는 게 싫다고 정치를 함구하고 회피하면 그것을 원하는 나쁜 정치인들에 의해 다툴 기회조차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죠."

(첫째 줄 왼쪽부터) 김민석 국무총리, 우원식 국회의장, 정청래 의원, (둘째 줄 왼쪽부터) 전현희 의원, 진교훈 강서구청장, 추미애 의원, 고민정 의원, (세째 줄 왼쪽부터) 한준호 의원, 서영교 의원, 장경태 의원, 정춘생 의원과 함께
(첫째 줄 왼쪽부터) 김민석 국무총리, 우원식 국회의장, 정청래 의원, (둘째 줄 왼쪽부터) 전현희 의원, 진교훈 강서구청장, 추미애 의원, 고민정 의원, (세째 줄 왼쪽부터) 한준호 의원, 서영교 의원, 장경태 의원, 정춘생 의원과 함께

엄마도 막내딸처럼 고향 일로에서 노인회장을 맡아 생활정치가로 활동 중이다. 박미현은 언니가 하는 순댓국집(햇빛촌순대국 본점)에 가끔 들러 일을 도와주고 한 그릇 얻어먹곤 한다. 따끈한 국물을 한 입 떠 넣으면 불편한 다리로 앉아 깔때기에 순대 속을 꾹꾹 눌러 넣던 아빠의 손이 떠오른다. 한 입 더 떠 넣으면 고향집 마당에서 형사들에게 끌려가며 안쓰럽게 막내딸을 바라보던 아빠의 눈이 선명하다.

그러나 이제, 인동초처럼 역경을 이겨낸 아빠는 더 이상 절지도 아프지도 않고, 아빠를 도둑맞고도 무서워 울지도 못했던 여섯 살 딸은 충분히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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