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칠십리(西歸浦七十里)는 조선시대 정의현청이 있던 현재 성읍마을에서 서귀포구까지 거리다. 1416년(태종 16년) 안무사 오식(吳湜)이 제주도를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으로 나누고 1423년(세종 5년) 안무사 정간(鄭幹)이 정의현청(고성)을 현재 표선면 성읍마을로 옮기면서 70리가 됐다. 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의 <탐라지>에서 서귀포는 정의현청에서부터 서쪽 70리에 있다. 원나라에 조공을 바칠 때 순풍을 기다리던 후풍처였다.
서귀포칠십리가 널리 알려진 것은 1937년 남인수가 <서귀포칠십리>를 부르면서부터다.
바닷물이 철석철석 파도치는 서귀포
진주캐는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휘파람도 그리워라 쌍돗대도 그리워
서귀포칠십리에 물새가 운다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아픔을 달래며 인기를 끌었고, 1993년 일본에서 활동하던 가수 이성애가 일본어로 오사카 등지에서 불렀다.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에게 향수를 달래주는 노래였다.
서귀포칠십리는 서귀포시민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영원한 이상향이자 서귀포의 아름다움과 신비경을 대변하는 고유명사다.
중국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기 위해 서복을 필두로 원정단을 파견했다. 원정단 규모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서복은 불로초를 찾아나선 지 9년 만에 진시황에게 돌아갔다. "바다 건너 봉래산에서 불로초를 찾았는데 상어와 환상의 생물 '교룡' 등이 가로막아 가져오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진시황은 1차 원정대보다 큰 지원 물자를 건네며 2차 원정을 보냈다. 그러나 서복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제주도 정방폭포 바위에 '서불과차(徐市過此)'가 새겨져 있다. '서불'은 서복의 다른 이름으로 '서복 왔다 갔다'는 뜻이다. '서귀포'라는 이름도 서쪽 서(西), 돌아갈 귀(歸), 항구 포(浦)로 '서복이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돌아간 항구'라는 뜻이다.
서귀포칠십리축제가 10월 17일부터 사흘간 열린다. 서른한 번째다. 서귀포시 중정로에서 정방로와 칠십리로를 거쳐 천지연폭포까지 2.8㎞ 구간에서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읍면동 행렬 사이사이에 공연팀과 시민 참가자들의 개성 있는 퍼포먼스가 어우러진다. 칠십리오픈런, 아동청소년연극제, 청소년페스타, 칠십리가요제 등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