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대한민국 제약산업의 큰 인물이 생을 마감했다. 임성기. 이름 석 자는 한 회사를 넘어 한 시대의 제약정신을 상징한다.
1940년 가난한 농가의 막내는 김포 통진고를 수석 졸업한 덕분에 중앙대 약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중외제약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임성기는 자신의 길을 찾기로 결심하고 1966년 서울 휘경동에 '임성기약국'을 열었다.
"이 약국은 나의 전부다."
임성기는 약국에서 먹고 자며 조제에 몰두했다. 동대문으로 이전한 후 '성병전문약국'으로 입소문을 탔다. 전봇대마다 『임성기임질약』이 붙었고, 성병에 걸린 파월장병을 위한 생약·항생제 조제약은 날개가 돋쳤다.

약국에서 '제조'의 비전을 본 임성기는 1973년 '한미약품'을 설립했다. 항생제 'TS산'은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소프트캡슐, 발포제, 츄정, 좌약 등 다양한 형태로 투약 편의성과 흡수율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1976년 '써스펜해열좌약'은 어린이해열제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신약개발은 나의 생명!"
열정은 KIST에서 운명적 인연을 만나게 했다. 김완주, 채영복 박사. 3세대 항생제 '세포탁심'과 '세프트리악손'을 국산화한 주역들이다. 두 항생제는 수출은 물론 다국적 제약사 로슈(Roche)로부터 600만 달러의 기술료를 받아내 한국 제약의 기술력을 각인시켰다. 임성기는 김완주 박사팀을 통째 영입했고 한미약품은 R&D제약사로 도약했다.
1997년 마이크로에멀전기술을 다국적 제약사 노바티스에 수출하기까지 했다. 7,300만 달러짜리 계약으로 한국 제약사 기술 수출 사상 최대였다. 2004년 고혈압치료제 '아모디핀', 2009년 복합신약 출시로 한미약품은 'R&D명가'로 입지를 굳혔다.

R&D를 향한 경영철학, 기술 국산화 의지, "신약 개발을 멈추지 않겠다"는 신념. 멈출 줄 몰랐던 임성기의 시계는 마지막 숨과 함께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아내 송영숙이 물려받은 시계는 작동되자마자 고장 나기 시작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