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김상윤 기자
  • CEO
  • 입력 2025.03.31 14:39
  • 수정 2025.04.01 09:47

양종희 KB 회장의 글로벌 고전기① 리콴유의 분노

스포츠는 홈(Home)이 아니라 어웨이(Away)의 승부다. 낯선 만큼 예측 불가다. 명장은 홈과 어웨이 전술을 달리한다. 펩 과르디올라(맨시티)는 구장의 잔디 길이까지 계산하고, 위르겐 클롭(리버풀)은 '선수비후역습'을 노린다. '홈전술'을 고집하면 패배한다. 한국 금융은 어웨이에서 약하다. KB는 더 약하다. 한국에선 '금융의 별'인 줄 알았던 KB는 동남아에선 반딧불이도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선 개똥벌레만도 못하다. 익스포저가 3조1,000억 원을 넘어섰다. KB의 '글로벌 고전'(苦戰)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양종희 회장의 역전법을 진단한다.

 

◆ 글 싣는 순서 ◆

① 리콴유의 분노

② 카자흐스탄 트라우마

③ 오클랜드에서 진 별

④ 동남아에서 빛나지 않는 별

⑤ 하나와 신한을 벤치마킹하라

⑥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라

⑦ 시험대 오른 양종희 리더십

양종희 KB금융 회장
양종희 KB금융 회장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는 1968년 네덜란드인 경제고문 알버트 윈스미우스(Albert Winsemius)로 하여금 씨티은행 책임자와 상의해 국제금융센터를 설립했다. 샌프란시스코거래소 폐장 후 취리히거래소 개장까지 7시간의 공백을 싱가포르거래소가 메우며 세계 금융시장에 합류한 것이다. 이후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기술과 인력, 인프라, 쾌적한 생활환경까지 두루 갖춘 금융허브로 만들었다.

모두가 싱가포르로 향했다. 한국에선 외환(1970년)이 선두였고, 조흥(1977년)과 한일(1980년)도 뒤따랐다. 국민은 외환이 입점한 지 25년이 지나서야 진출했다. 

1990년대 싱가포르는 뉴욕, 런던, 도쿄와 함께 세계 4대 금융시장으로 성장했다. 1997년 싱가포르 아시아 달러시장은 5,000억 규모로 국내 시장의 세 배에 달할 정도로 커졌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는 퇴임 후에도 JP모건 국제자문으로 뛰며 싱가포르 은행의 세계화 추진을 멈추지 않았다. 무역 기반도 없는 작은 도시국가가 리콴유의 엄격한 법규와 철저한 감독으로 신뢰받는 금융허브로 자리잡았다.

싱가포르 은행들은 1987년 블랙먼데이에 이어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도 견뎌냈다. 외래 은행들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손실을 감수하고 떠나지 않았다. 어렵다고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상륙한 지 2년밖에 안 된 국민은행은 조바심이 났다. 결국 '글로벌포비아'를 못 버티고 철수했다. 리콴유는 분노했고, 신뢰를 저버린 국민은행에 싱가포르 금융당국은 "100년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고 독설을 쏟아냈다. 화창한 날 빌려준 우산을 궂은 날 빼앗아간 셈이었다.

KB는 2023년에야 지점을 개설할 수 있었다. 26년 만이었다. 그 사이 외환을 인수한 하나, 조흥을 흡수한 신한, 한일과 상업이 합병한 우리은행은 싱가포르에서 기업금융과 글로벌금융의 기반을 다지고 전 세계로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리콴유는 사라졌지만, 그의 분노는 아직도 싱가포르에 박제돼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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