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고호경 칼럼니스트
  • Column
  • 입력 2024.12.23 17:43
  • 수정 2024.12.24 09:46

[노가리 고호경의 500c씨네] 〈아노라〉 비극적 서사를 희극적 미장센에 담은 블랙코미디

칸이 사랑할 션 베이커표 영화

〈아노라〉_2024, 션 베이커 / ⓒ유니버설픽처스
〈아노라〉_2024, 션 베이커 / ⓒ유니버설픽처스

5월, 7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기다려 왔던 터라 곧바로 예매하고 션 베이커(SeanBaker)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처음 본 것은 감독의 필모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플로리다프로젝트>다. 충격 그 자체였다. ‘무슨 이런 어린이들이 있지?’ 미혼모 앨리의 딸 무디, 비슷한 처지의 친구 스쿠티, 엄마가 도망가 할머니와 사는 젠시, 희망도 미래도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답인생’들인데 해맑기 그지없다. 

절망적인 상황과 대조적으로 밑바닥 무채색 하류인생들이 누비는 플로리다의 하늘은 티없이 맑고 건물과 거리는 총천연색이다. 아동복지국의 분리 조치에 뛰쳐 나와 젠시에게 “두 번 다시 못 볼지 몰라!” 하는 무디의 외침은 큰 울림을 준다. 관객에게 이 아이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해 달라 간청하는 듯하다.

<탠저린>(2018) 역시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트렌스젠더 여성들의 소외된 세계를 다루고 있다. <플로리다프로젝트>의 아이들, <탠저린>의 신디・알렉산드라, <스타렛>(2014)의 제인(포르노배우). 감독은 주로 소외계층과 이민자(<탠저린>의 택시기사, <아노라>의 끄나풀 3인방)들을 통해 아메리칸드림의 음습한 이면을 적나라하고 냉소적으로 표현했다. <아노라> 역시 ‘스트리퍼’라는 성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아노라〉_스틸컷 / ⓒ유니버설픽처스
〈아노라〉_스틸컷 / ⓒ유니버설픽처스

<아노라>는 끝간데없이 화끈한 19금이다. 전반부는 스트리퍼 애니가 재벌2세 이반을 손님으로 만나 섹파가 되고 결혼까지 숨돌릴 틈없이 전개된다. 감각적인 연출과 꽉 찬 사운드트렉은 뮤비 같다. 무엇보다 미키 메디슨의 ‘헐벗은’ 혼신의 연기가 돋보인다. 성노동자로 밑바닥인생을 살지만 자존심만큼은 견고하다. 온갖 모욕에도 당차게 맞서는 애니의 모습에 관객은 매료된다. 감금되자 발악하며 장정 둘을 제압하는 육탄전은 웃음포인트이자 그녀의 기세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렇게 신데렐라 성공스토리를 답습하는가 했다.

후반부에 접어들면 신데렐라 클리셰(cliché)를 비웃 듯 좌충우돌 대환장 블랙코미디가 펼쳐진다. 결혼 무효를 위해 파견된 이반 부모의 끄나풀(이고르, 토로스, 가닉)들은 환상에 취해 있는 애니를 다그친다.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이반을 붙잡으려는 애니의 고군분투가 눈물겹도록 웃기고 씁쓸하다. 

후반부는 리얼리티코미디다. 애니는 끄나풀 3인방에 의해 신데렐라콤플렉스에서 해방된다. 극중에서 유일하게 ‘스트리퍼’ 프레임을 씌우지 않고 애니를 대하던 이고르에게 위로받는 뭉클한 열린 결말은 희망을 선사한다. 감독은 노블레스오블리주는커녕 사고를 치고 수세에 몰리면 도망치는 가진 자의 무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반은 사과 같은 거 절대 안 해 !”하는 이반 엄마의 모습은 스노비즘(snobbism)의 끝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CTRL+C, CTRL+V’한 듯한 가진 자의 횡포와 안하무인을 역설한다.

<아노라>는 최근 칸영화제가 지향하는 주제인 계급갈등(<기생충>, <슬픔의 삼각형>)과 가족해체(<추락의 해부>, <티탄>), 소외계층에 대한 시선(<어느 가족>, <나! 다니엘 블레이크>)을 적절히 버무려 공존하기 힘든 계급구조를 비판하고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사회 부조리를 까발리고 있다. 소외계층의 하류인생을 주로 다루어 왔는데 비극적 서사를 희극적 미장센(mise-enscène)에 담아낸 독창적 연출이 놀랍다. 내년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은 물론 감독・각본・주연상 후보도 유력하다.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